Immoral

 

 

 

w.희삼

 

 

“...아...”

“......”

 

눈앞이 캄캄하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소년은 다급하게 한 걸음 물러서며 제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눈을 피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스스로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었던 것은 알딸딸하게 올라오는 술기운 탓이었다고 변명 해 보았지만 터무니없는 억지였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뭐가 그렇게 쉽냐?”

 

고개 숙인 머리위로 앞에 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가 난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턱대고 제 입술을 갖다 댄 부하의 행동에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저와 남자의 사이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남자와 남자 사이의 일이라는 것을 배제하더라도 둘의 사이에는 소년의 누나가 존재했다. 비록 그녀는 죽고 없었지만 남자에게 그녀는 지우고 싶다고 지울 수 있는 가벼운 감정의 상대가 아니었다. 소년은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워했고, 지금도 미워한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러버렸을까. 소년은 다시 한 걸음 물러서며 남자의 시선을 외면했다.

 

“다 쉽냐? 검 휘두르는 것도,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그런가보다. 저는 다 쉬운가보다. 사람 가지고 노는 게 특히, 제일 쉬운가보다.

 

소년은 오늘따라 유난히 목에 두른 스카프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눈가가 시큰거렸다. 뭐라고 한 마디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네 인간성 바닥이라는 거, 이제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쯤 해둬라. 두 번은 안 봐준다.”

 

차분했지만 소년을 비난하는 목소리에는 경멸이 담겨있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맞아, 맞는 말이잖아?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문을 걸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쥐고 있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처럼 웃으면서 남자의 속을 긁어놔야 하는데 지금은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몰라 약간의 공황상태마저 온 것 같았다.

 

“술 덜 깼으면 들어가 잠이나 자.”

 

어느 추운 겨울밤, 큰 사건을 해결하고 들뜬 기분에 신센구미가 전체 회식을 하던 날이었다.

 

**

 

어색해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남자가 일방적으로 소년을 무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매일 같이 말을 섞는 것도 짜증나는 상대가 외려 입을 닫고 무시를 해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그러나 기분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절로 웃음이 나와야 될 상황이건만 어째서 이렇게까지 비참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제 2의 사춘기라도 온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지금 저가 이따위 기분이 드는 것을 알 것 같기도 하다는 게 미치게 싫었다. 아니, 알 것 같기도 하다는 게 아니라 알고 있다. 그래서 미치게 싫은 것이다.

 

소년은 조수석에서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옆에 앉은 상관은 마치 차안에 저 혼자인 냥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매캐한 담배냄새가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창문을 열기 위해 문에 달린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운전석에서 잠금을 해 놓은 모양인지 열리지 않았다. 소년은 눈을 감은 채로 상관에게 말했다.

 

“창문 좀 열고 가요.”

“......”

 

그러나 상관은 말이 없었다. 마치 소년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소년은 조금 더 큰 소리로 상관에게 말했다.

 

“창문 좀 열고 가자니까요.”

“......”

 

역시나 였다. 남자는 소년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냥, 오로지 저 혼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소년은 짜증이 났다. 저에게 화가 난 것은 알겠지만 계속되는 무시는 사람을 열 받게 만든다.

 

“...그까짓 입술 좀 부대꼈다고 유세는.”

 

소년의 비아냥거림이 나지막하게 차 안에 울렸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운전석의 남자는 핸들을 틀어 급하게 갓길로 차를 세웠다.

 

“다시 말해봐.”

“난 없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야.”

“왜요?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누가 보면 제가 순결이라도 뺏은 줄 알겠어요?”

 

남자는 시동을 끄고 차키를 빼 뒷좌석으로 던졌다. 털털거리던 경찰차는 이내 조용해졌다. 남자는 분을 삭이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살벌했다.

 

소년은 그런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잘생긴 얼굴이 매섭게 눈을 치뜨고 있었다. 웃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기분이 애매했다. 저로 인해 남자가 열 받았다는 사실이 즐겁긴 한데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다. 그건 너무 궁상맞게 보일 것 같다.

 

소년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다시 눈을 감았다. 차 안에 가득 차 있는 담배연기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창문 좀 열어줘요. 토할 것 같으니, 읏!!!”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자가 소년의 멱살을 틀어쥐고 제 쪽으로 거세게 끌어 당겼다. 소년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놀라서 눈을 뜨니 제 코앞에 상관의 얼굴이 있었다.

 

“네 말이 맞아. 그까짓 거 한두 번 부대끼면 뭐 어때?”

“......”

“한 번 더 해볼래? 별 것도 아니잖아.”

“......저질.”

“새삼스럽게.”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담배냄새가 입 안을 덮쳐왔다. 소년은 숨을 멈추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입 안을 휘젓는 남자의 혀가 소년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어지럽고 숨이 막혔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소년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저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저도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제 누이와 남자, 그리고 신센구미 대원들, 마지막으로 뜬금없게도 해결사 형씨까지 뒤죽박죽 섞여 엉망진창이었다.

 

누님, 미안해요.

 

소년은 저가 왜 누나에게 사과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냥 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참고 있던 숨이 다할 때쯤 남자의 입술이 떨어졌다. 소년은 제 멱살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억지로 풀어냈다. 그리고 자세를 고쳐 앉아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자꾸만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이 이상했다. 정말로 오늘은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

 

남자는 핸들에 머리를 박고 한숨을 쉬었다. 저 콩알만 한 녀석의 도발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다. 원래 사람 속을 긁는 것이 취미인 녀석이다. 이만한 일로 화를 낼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는 어른스럽게 대처하지 못한 자신을 저주했다.

 

순간적으로 치솟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저는 아직도 철이 없는 것 같았다. 이래저래 한심한 부분이 너무 많아 역겨웠다. 어설픈 연심(戀心)도 그 중 일부였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어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해서 다가오는 그녀를 외면했다. 그 마음을 모르는 척, 관심 없는 척 하며 일부러 상처 주었다. 그것이 저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적어도 저와 인연이 닿아 더 불행해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병을 얻어 그만 죽어버렸다. 차라리 먼저 취해버릴 것을.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보지 않은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이 어설픈 마음으로는 도저히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철저하게 등을 돌리고 마지막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해서 저는 죄인이었다.

 

그 여자는 소년의 누이였다. 소년은 저를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것을 예견이라도 했던 걸까. 감 하나는 타고난 녀석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마지막까지 제 누이를 봐주지 않은 저를 미워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고, 다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밉기로서니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제 누이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웃는 것만 봐도 심장이 따끔거려오는 저에게 이런 식으로 패악을 부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저가 참았어야 했다고 해도.

 

“......이제 그만하자.”

“뭘 시작한 적도 없어요.”

 

소년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대답했다. 남자는 핸들에 파묻은 얼굴을 들어 그런 소년을 쳐다보았다. 무섭도록 그녀와 닮은 옆모습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 가야 네 속이 시원하겠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대답을 피하는 소년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누가 들으면 진짜로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줄 알 것이다.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방금 전까지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으면서 또 담배를 찾게 된다. 그러나 품속을 뒤져 꺼내든 담배 곽은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사람이 재수가 없으려니 별게 다 말썽이다.

 

“너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성격이 나쁜 것뿐이에요. 딱히 히지카타씨한테만 이러는 것도 아니고.”

“딴 새끼들한테도 이런 요망을 떨고 다닌다?”

“말이 이상하네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그러게. 누가 보면 네가 나한테 마음 있는지 알겠다.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어.”

 

소년이 남자의 말에 얼굴을 구겼다.

 

“......미치셨어요?”

“그럼 안 미치고 있겠냐, 내가? 지갑 털고, 현장에서 엿 먹이고, 틈만 나면 부장자리 노리면서 완전범죄나 꿈꾸는 넌 그냥 귀엽게 봐 줄 수 있어. 그런데 하다하다 이제 날 호모로 만들려 들어?”

“확대 해석 하지 말아요. 난 그쪽으로 취미 없으니까.”

“그럼 뭐 하자는 거야. 네 누나 일 때문에 나 엿 먹이려고 그랬다면 엇나가도 한참 엇나갔어. 난 죽은 사람 붙들고 삽질 안 해.”

 

남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소년은 한참동안 대꾸가 없었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뒷좌석으로 던진 차 키를 더듬거리며 찾았다. 손에 걸리는 조그마한 쇳덩어리를 간신히 찾아 쥐었을 때, 소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요. 제가 너무 엇나갔나 봐요.”

 

**

 

남자는 집무실에 틀어박혀 눈으로는 보고서를 읽으며 소년과의 일을 생각했다. 결국은 그랬던 거였다. 사람을 가지고 놀길 좋아하는 꼬마는 제 얼굴로 남자의 마음을 흔들 수 있지 않을까하여 호기심 반, 복수심 반으로 보란 듯이 남자의 입술을 가져갔다.

 

그는 천천히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겨울 찬바람에 일어난 입술 각질이 손끝에 느껴졌다. 저와 다르게 소년의 입술은 매끄러웠던 것 같다. 희미한 체리향이 났던 걸로 보아선 따로 입술 보호제를 바르는 것 같았다. 계집애도 아니고. 남자는 툴툴거리며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그 일 이후로 소년과 저는 딱 1m만큼 멀어졌다. 둔영 내에서 마주치는 순간에 고개만 까닥하며 인사를 하던 소년을 향해 똑같이 눈으로 인사하고, 함께 순찰을 나갈 때에도 사적인 농담은 오가지 않았다. 어쩌다가 술자리를 가지는 날에도 멀찍이 떨어져 앉아 말을 섞을 일은 자연스럽게 사라져 갔다. 일주일에 한 번은 털리던 지갑도 언제나처럼 두둑했고, 현장에서는 사건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일이 평탄했다. 그래서 남자는 모든 것이 잘 해결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은 알 수 없는 불안에 이상하리만치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부하들의 작은 실수에도 불같이 화내고, 틈만 나면 비속어를 입에 담기 일쑤였다.

 

늘 그랬던 건 아니고?

 

물론, 평소에도 그랬지만 요즘 들어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고 해야 하나. 남자는 원인 모를 저의 변화가 꺼림칙했지만 애써 모른 척 했다.

 

한참을 멍하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방 안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것을 보니 곧 해가 저물 모양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일어서 옷걸이에 걸린 제복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집무실 문이 열리며 부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오키타 대장이 칼에 맞아 지금 병원으로 후송중이랍니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부하를 쳐다보았다.

 

이상했다. 머릿속에 하얀 페인트가 들이 부어진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무작정 부하를 밀치고 달려 나가는 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제복 코트가 흙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있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무슨 이유 때문에 저가 이렇게 다급하게 뛰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남자는 소년이 향하고 있는 병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요령 좋게 잘 피하셨네요. 장기 쪽은 손상되지 않아서 일주일 정도 입원하시고 통원치료 받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 진통제 두고 갈 테니 시간 맞춰 드시면 됩니다.”

 

소년은 얌전히 침대 맡에 기대 의사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의사는 주의사항과 약 복용 시간에 대해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바빠 죽겠는 모양인지 환자 얼굴은 보지도 않고 진료 차트에 얼굴을 박고는 다다다 거리며 쏘아대는 통에 소년은 그런 의사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말 중간 중간에 뱉어대는 전문 용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니 의사는 개의치 않고 말을 쏟아냈다.

 

그런 의사의 속사포 랩에 맞서 소년의 침상 옆에 서 있던 곤도는 의사에게 감사하다며 몇 번이나 인사를 해댔고, 그 옆에 대원 몇몇은 초상이라도 난 얼굴로 침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모든 광경이 소년에게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보면 죽을병에 걸린 저를 의사가 신의 손으로 되살려 낸 줄 알겠다. 고작해야 뱃가죽에 칼이 좀 박혀 들어간 것뿐이었다. 물론 장기 쪽이 손상되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목숨 떼걸어 놓고 칼을 휘두르고 다니는데 그 정도 위험쯤이 없을까. 하물며 제 쪽에서도 여러 사람 명줄을 재촉하고 다니는데, 저라고 위험을 피해가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상사나 그 주변 놈들이나 아직도 저를 열 살배기 꼬마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년은 눈이 피곤해지려는 병실 풍경에 눈을 감았다. 다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슬슬 수술 받은 부분이 아려오는 걸보니 마취가 풀리려는 것 같았다. 소년은 아직도 고맙다고 인사를 해대는 곤도를 불렀다.

 

“곤도씨. 저 약 먹고 잘래요. 좀 피곤하네요.”

“어? 아아, 그래. 이거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우린 이만 가보마. 내일 다시 올게.”

“네. 내일 봬요.”

 

소년은 우르르 몰려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진통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진통제를 꺼내 한 알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삼켰다. 물도 없이 삼켜진 진통제가 영 매끄럽지 못하게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소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의 부상은 완전히 제 탓이었다. 한 눈을 팔았다. 눈앞의 적에 집중해도 큰 부상을 입거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 저는 멍청하게 딴 생각을 하며 검을 휘둘렀다. 상처가 이만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소년은 남자의 생각을 했다. 검을 잡고 휘두르면서, 그날 제가 했던 실수에 어이없어 하던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차 안에서 그에게 멱살이 잡혀 했던 키스도 잊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음에도 소년은 한없이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이유 없이 서러웠고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저가 남자의 무엇을 원망하는지조차 몰랐다.

 

그렇게 머릿속은 온통 남자의 생각뿐이었다. 검이 제 뱃가죽에 박혀 있음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쓰러진 뒤였다. 휘청 이며 피가 고인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았다. 주변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검을 쥔 손이 떨렸다. 무엇이 무서워서 손이 떨렸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웃기게도 정신은 또렷했고 저는 병원으로 실려 오면서도 기절 한 번 하지 않았다. 수술대에 올라 마취약이 온 몸에 퍼져갈 때쯤에야 소년은 흐릿하게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을 놓았다. 마지막까지 제 머릿속에서는 남자의 생각뿐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소년은 스스로를 비난했다. 어째서 그 사내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혹시 저가 정말로 남자에게 마음이 있다거나?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그런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달달한 연정이라던가 하는 그런 종류의 마음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지금 봐도 그렇다. 남자가 다친 저를 보러오지 않았지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단지 머릿속에서 남자가 나가지 않고 있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잠이나 자자. 자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안 할 테니까. 소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쾅!!!’

 

병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소년은 깜짝 놀라 다시 눈을 떴다. 아직 약기운이 돌지 않아 아릿한 뱃가죽을 부여잡고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맡에 기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거칠게 열린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저가 오늘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소년은 얼이 빠진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뛰어온 모양인지 셔츠와 얼굴이 땀에 젖어 있었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소년에게까지 들렸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남자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열린 병실 문을 닫고 천천히 소년 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내 털썩 주저앉고는 품안에서 담배 곽을 꺼내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제야 소년이 입을 열었다.

 

“병원은 금연이에요.”

“금연 홍보대사로 취직했냐?”

“나쁘지 않네요, 그 직업도.”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살만한가 보다?”

“죽을 정도면 관 뚜껑 덮었겠죠.”

 

남자는 짜증스럽게 담배 곽을 침대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소년은 어이가 없어 물끄러미 남자를 쳐다보았다.

 

“......여기 왜 왔어요?”

 

소년의 물음에 남자가 들릴 듯 말듯 ‘그러게.’ 하고 대답했다. 왜 왔을까. 남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왜 이곳으로 달려왔는지를, 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막말로 검 휘두르고 다니는 놈 치고 안 다치는 놈 없다. 특히나 저희같이 다른 사람 명줄 재촉하러 다니는 것이 직업인 놈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소년의 말대로 죽을 정도면 관 뚜껑을 덮고 있었겠지. 남자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뒤죽박죽이다. 뭐 하나 명료하게 알 수 있는 감정이 없다.

 

“설마 나 걱정 되서 그렇게 허겁지겁 뛰어 왔습니까?”

“......머리에 칼 맞았냐?”

“그럼 이만 가보세요. 저 피곤합니다. 잘 거예요.”

 

소년은 진짜 피곤한 모양인지 다시 꾸물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아 피를 한바가지는 쏟은 모양이었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소년의 침대에 던져두었던 담배 곽을 집어 들었다.

 

남자는 찬찬히 눈을 감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이상하게 그 얼굴을 보면서 뺨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네가 머리에 칼 맞았냐. 남자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타박을 놓았다. 그러나 남자는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놓지 않았다.

 

“......오늘, 되게 이상한 거 아세요?”

 

소년이 눈을 감은채로 말했다.

 

“......”

 

남자는 소년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이제 그런 짓 안 할 거예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쓴 적 없어.”

“여기 왔잖아요. 신경 쓰여서.”

“......”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

“동정하지도 말고.”

“......그래.”

“이제 진짜 가보세요. 저 졸려요.”

“쉬어라.”

 

들어올 때와는 달리 조용히 병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소년은 찬찬히 눈을 떠 병실 천장을 쳐다보았다. 진통제를 먹었는데도 이상하게 뱃가죽이 아렸다. 깜빡거리는 눈이 뻑뻑해 먼지가 잔뜩 낀 유리창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베갯머리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저가 왜 울고 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지 꼴사납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병실에 아무도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The end

 

 

 


 

 

 

어......어설프게 끝난 것 같은데.....제 착각이 아니겠죠. 그냥 어설프게 끝난게 맞는겁니다^-T

제 마음속의 히지오키는 이렇게 항상 어설퍼서 그런가 제대로 끝을 본 히지오키가 별로 없습니다.

히지는 도덕적인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가 애를 제대로 건들이지도 못하고 그냥 손에 놓고 안절부절 못할 것 같아요. 그런 히지가 답답한 오키타는 계속 삐뚤어 지고ㅋㅋㅋ그래서 얘네는 될일도 안될거야...ㅅㅂ...ㅋ...ㅋ..

근데 또 알콩달콩 깨를 볶고 이런건 취향도 아니고 히지오키에선 가당치도 않은 설정이라 생각되서 그런가 쓰지도 못하고 쓸 엄두도 안나고 ㅋㅋㅋㅋㅋㅋㅋ그냥 이래저래 요즘 글쓰면서 잡생각이 많아서 이따위 그지같은 완성이 나왔나 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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