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ㅈ.희삼

 

 

 

 

 

05.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어쩌다보니 감당 못 할 것 같은 일에 휘말리기도 한다. 한낱 인간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으랴. 이 명제에 대해서는 스가와라도 완전히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아니었다. 아니, 사건이라기보다는 사고.

 

개 같이 술을 퍼 마신 뒤 의식을 날려버린채 학과 동기랑 원나잇을 했다. 그것도 남자랑. 여기까지면 거 사고 한 번 요란하게 쳤네,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원나잇으로 끝날 줄 알았던 사고가 한 번 더 이어졌다. 이번엔 개 같이 술을 퍼 마신 건 맞지만 상대방 쪽에선 멀쩡한 제 정신이었고, 불행하게도 열심히 일을 치루는 와중에 스가와라 본인 또한 제 정신을 차려버렸다.

 

아. 진짜 속된 말로 좆됐다, 라는게 이런 건가 싶었다.

 

인간이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이번 건은 사고를 쳐선 안 되는 경우에 해당했다. 그러나 일을 저지른 다음이라면 사후처리라도 깔끔했어야 했다. 감당 못 할 일이기에 한 번으로 끝냈어야 했고, 완전히 기억에서 날려버린 뒤 한 십년쯤 지난 뒤에 내가 그런 사고를 쳤었어? 라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시나리오대로 흘러갔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스가와라는 제 방 침대에 누워 허공에 발차기를 했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그 와중에도 찌르르 아픈 허리 때문에 마음껏 공중에 발길질도 못 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부가 옵션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환장할 만한 것은,

 

[야, 거기 잘생긴 오이카와씨~]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자신이 멀쩡한 오이카와의 멱살을 잡았던 영상이 어렴풋이 떠오르며

 

[그 날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한 번 더 자자!]

 

라고, 호탕하게 두 번째 사고에 기름을 들이부운 자신의 과오가 떠올라버렸다는 것이었다.

나가 죽자, 스가와라 코우시.

 

 

06.

오이카와 토오루는 기본적으로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았다. 오는 사람 막지도 않았고, 가는 사람 붙잡지도 않았기에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로 가득했다. 물론 이런 행동을 보이는 오이카와에게 진심인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만, 기본적으로 멀쩡한 외양이 크게 한 몫을 한다는 것 정도는 오이카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 본인도 진심인 적이 없었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고, 그저 그 멀쩡한 외양을 이용해 어떻게 하면 예쁜이들과 더 끈적하게 놀아볼까 정도나 생각하는 평범한 이십대 초반의 변태였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그런 자신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벼운 것은 인정하는 바였지만, 이 사실과는 별개의 논제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쁜놈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흐릿한 기억 속에 귀여운 여자에게 뺨을 얻어 맞으며 들었던 '나쁜 새끼'라는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저는 단 한 번도 진심이었던 적이 었었고 진심을 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뺨을 얻어 맞으면서도 오이카와는 끝까지 매너를 지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멋대로 착각해서 혼자 상처 입은 여자였지만 그래도 오이카와는 아량 좋게 뺨을 내주었던 것이다. 한 번 맞아주고, 깔끔하게 끝낼 수 있었으니까.

 

이런 자신을 보며 이와이즈미는 '작작 좀 해라, 이 쓰레기 같은 놈아' 라는 폭언을 퍼부었고, 하나마키는 조용히 엄지를 추켜 세우며 능글맞게 웃었다.

 

뭐가 어찌되었든 오이카와는 여전히 인기가 많았고, 여전히 가벼웠다. 오이카와는 그런 자신이 좋았고 앞으로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가와라 코우시를 만나기 전까지는.

 

 

07.

지금부터는 오이카와의 입장에서 스가와라 코우시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같은 과였지만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스포츠 추천으로 들어온 배구 선수였고, 그는 일반 입학으로 들어온, 말 그대로 교육과의 평범한 학생이었으니까. 그래서 스케줄이 완전히 달랐고, 심지어 심화전공도 달라 마주치는 일이라고 해봤자 백여명의 교육과 학생들이 집단으로 참여하는 체육대회 같은 행사가 고작이었다. 그래도 교육과 강의동을 오며 가며 한 번쯤은 봤을 법도 하지만, 워낙에 희미한 인상이라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런 스가와라를 눈 여겨 보기 시작한 것은 입학하고 한 학기가 한참이나 지난 늦가을 쯤 부터 였다.

 

스포츠 추천으로 입학했다지만 명색이 체교과 학생이었던지라 체육교육과 내에서는 모르는 얼굴이 없었고, 두루두루 친했다. 그 중에 특히 잘 맞는 동기 놈이 하나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 까진 배구를 했다고 해서 제법 가깝게 지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 동기 놈과 함께 사는 룸메이트라고 했다. 희미한 인상이 강렬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웃는 얼굴이 예쁘다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그런 첫 인상과 대조적으로 호탕한 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여느 사내놈들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가슴께가 간질거리며 조금 설렜던 것 같기도 했다.


"스가와라 코우시. 같은 교육관데 몰랐지? 나 심화가 윤리라."

"아, 난 체육..."

"너 모르는 사람 우리 과에 있으려고? 잘생긴, 오이카와씨."

"스가와라씨. 쿠로오씨도 외모에서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말하는 데 양심이 있어라. 넌 어째 갈수록 뻔뻔해져?"


제 룸메이트를 향해 거침없이 외모 디스를 해대는 모습이 꽤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쯤해선 성격이 안 좋다는 판단이 내려져야 옳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이런 것이 첫 눈에 반했다는 건가, 싶기도 했다. 아니, 싶기도 했다가 아니라 그런 거였다.


세상에 진심이었던 적 없었던, 가볍기 그지없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첫 눈에 반해버린 것이었다.


*


그래서 오이카와 토오루는 기회를 노렸다. 잘 나오지도 않았던 과 모임에도 줄기차게 나가기 시작했고, 운동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던 소소한 술자리 모임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서서히 과에 젖어들어 스가와라에게 다가가기 위한 초반 작업들을 진행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초반 작업의 첫번째 타겟은 쿠로오 테츠로. 스가와라의 룸메이트였다. 그러나 고등학생 시절, 수비에 발군이었다던 지난 날의 명성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은근슬쩍 스가와라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묘한 눈빛으로 오이카와를 관찰하곤 했다. 그러다가 과한 관심이 이상하다 여겨졌을 때 결국 쿠로오가 오이카와에게 질문했고, 오이카와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도대체 걔한테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나 걔한테 반한 것 같아.'

 

그러나 과한 뻔뻔함은 독이랬던가. 그렇게 당당하게 커밍아웃을 하고 난 뒤부터 쿠로오는 스가와라에 대한 말을 아끼곤 했다. 그것도 매우 지나치게. 예상했던 반응이라 그렇게 놀랍지도 않았지만 뭔가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마음이 급했음으로 그 이유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쿠로오 공략을 포기했다.

 

다음으로 찔러본 곳을 스가와라와 붙어 다니던 사와무라 다이치였다. 운 좋게도 사와무라와는 구면이었다. 소소한 술모임에 종종 나가기 시작하며 얻은 성과였다. 거기다 어릴때부터 줄기차게 함께 붙어다니던, 소위 말하는 불알친구라나. 이 정도면 오이카와는 대어를 낚은 것이었다. 그를 통해 스가와라가 참석하는 술자리는 절대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그렇게 첫 번째 원나잇에 성공했던 것이다. 비록 기억은 희미했지만.

 

그래도 그 술자리에서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가와라도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배구를 했었다는 것, 세터였다는 것, 여자친구는 2명 쯤 사귀어보았고 현재 사귀는 여자는 없다는 것. 이 정도의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실로 오이카와와 스가와라의 관계는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었다.

 

그 뒤로 스가와라는 완전히 취해버려서 연신 방실거리며 오이카와의 어깨에 기대 알지도 못할 외계어를 중얼거렸다.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던 단어는 어지러워, 쿠로오가 걱정할텐데, 오이카와, 오이카와, 오이카와. 정도였다. 제 품에 안기다시피 기댄 스가와라는 꼬부러진 발음으로 그렇게 오이카와의 이름을 불러댔다. 이 귀여운 술버릇에 어찌 오이카와가 얌전히 그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으랴. 물론 저도 술에 진탕 취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던 것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첫 번째도, 두 번째 잠자리도 전부 스가와라가 먼저 유혹해서 일어난 일이라 여겼다. 착실히 스텝을 밟는 플라토닉한 연애를 꿈꾸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을 벌이려는 계획은 없었다. 이건 정말로 결백했기에, 오이카와는 말도 되지 않는 논리였지만 전부 스가와라의 탓이라 책임소재를 떠넘겼다. 그리고 두 번째 잠자리를 가진 뒤에는 말도 안 되는 행복감에 차올라서 이제 스가와라가 제 것이 된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되었어야 했다.

 


 

이거 왜 이렇게 길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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