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奇譚)

 w. 희삼

 

 

 

01.사건

영원히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스산한 바람이 겨울을 알려오듯 찬 공기가 소년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미약하게 내뱉는 숨이 뽀얀 안개를 만들어 시야를 가렸다가 흩어졌다. 소년은 그런 날씨에 굴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적한 공원의 구석에서 저의 얼굴을 훑는 시린 바람을 느끼며 가만히, 넋을 놓은 사람처럼 깊게 생각에 빠져들었다.

 

소년은 단 한 번도 영원히 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에 누구나 한 번쯤은 철없이 상상해볼 수 있을만한 생각이었지만 이상하게 소년은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소년은 단지 이제 와서야, 뒤늦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놀랐을 뿐이었다.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영생을 꿈꿀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년은 무섭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쳇바퀴를 굴리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햄스터의 쳇바퀴처럼 영원히 사는 것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 주변의 모든 이들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데 저는 닿을 수 없는, 영원히 산다는 것은 그런 슬픈 일일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소년은 안도했다.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소년은 이내 얼음장 같은 손을 입가에 대고 입김을 불었다. 따뜻한 입김이 잠깐이나마 손을 녹여준다. 그리고 다시 멍하니 3. 공원의 저편에서 한 남자를 발견하고는 언제 넋을 놓았냐는 듯 벌떡 일어섰다. 소년은 남자를 향해 뛰는 듯 걸어서 그의 앞에 섰다.

 

여기서 뭐하세요?”

 

사납게 찢어진 눈매가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보이게 만들었지만 훤칠한 이목구비는 외려 잘생긴 축에 속했다. 수려한 외모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잘생긴 남자는 저를 향해 귀염성 있게 말을 붙여온 소년을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여기서 뭐하세요? 이걸 콱, 엎어놓고 팰 수도 없고!”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년은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억울하다는 얼굴로 어필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되레 그런 행동이 남자의 부아를 더 돋운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화가 많이 나 있어 보였다. 대게는 이런 식으로 쳐다보면 이내 눈을 돌리고 관두자는 말을 하곤 했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유순한 눈매를 가진 소년의 얼굴은 귀여운 편에 속했다. 성격은 무미건조하고 애교 없는 편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년을 귀엽다고 생각했다. 주변인들의 그런 어이없는 착각은 대부분 소년의 귀염성 있는 얼굴이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대화를 해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냉담하고 배려 없는 소년이었지만 이상하게 그런 면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그를 귀엽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소년의 앞에 선 이 남자는 달랐다. 유일하게 귀여운 면이 안 먹혀 들어가는 상대이기도 했다. 해서 이렇듯 억울하다는 얼굴로 멍하니 상대방을 쳐다보는 소년을 향해 유일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딴 식으로 쳐다보지 마. 사내새끼가 역겹게 귀여운 척은......”

, 안 통할 줄 알았어요.”

알면 관둬. 매번 짜증나니까.”

통할 때까지 한 번 해보려고요.”

너는 오늘 토 나올 때까지 시말서 좀 써야겠다.”

 

남자는 말을 마치고 휙 뒤돌아 왔던 걸로 걷기 시작했다. 소년은 울상을 지으며 터덜터덜 남자의 뒤를 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곤도씨를 구워삶아 놓고 땡땡이칠걸. 소년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후회했다.

 

평소 땐 이런 일로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남자였지만(워낙에 자주 있는 일이라) 오늘은 유난히 신경질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가 늘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보이지 않았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니코틴을 하느님처럼 모시는 남자의 입에 담배가 없는 것은 결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소년은 결국 남자의 입에 담배가 물려있지 않아 저가 옴팡지게 덤탱이를 썼다고 생각했다. 이래서 흡연자는 싫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 잠깐의 순간에 이렇게까지 짜증을 내는 것은 주변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시네요.”

이 망할 놈의 동네는 왜 편의점이 안보이냐?! 하다못해 자판기라도 있으면 좀 좋아?”

체내에 쌓여있는 니코틴으로 버텨보세요.”

몰라. 짜증나니까 입 다물어.”

 

뭐야, 결국 담배를 못 피워서 짜증을 내는 거야? 정말로?

 

소년은 어처구니가 없어 남자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결국엔 쓰지 않아도 될 시말서를 쓰게 된 이유는 바로 저 이유 때문이었다. 역시 곤도씨를 구워삶아 놓고 나왔어야 했는데. 소년은 억울함에 열이 뻗쳐 추위까지 잊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우뚝 멈추어 서서 소년을 뒤돌아보았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왜요?”

네 구역에서 이상한 시체 나왔다.”

 

남자의 뜬금없는 소리에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체면 시체지, 이상한 시체는 또 뭐야? 소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인상을 쓰며 뒤통수를 긁어댔다. 말하기가 영 싫은 모양인지 답지 않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소년은 그런 남자를 재촉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하여간 세상에 취미 이상한 새끼들 많다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

 

오늘따라 남자는 참 이상했다. 담배가 없다고 저에게 짜증을 내질 않나, 일에 있어 뜸을 들이지 않나, 하여튼 그답지 않았다. 보통은 무언가를 말할 때 막힘없이 스트레이트인 남자였다. 그런 그가 말하길 꺼린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도대체 얼마나 이상한 시체 길래?

 

히지카타씨가 더 이상하니까 시원하게 말해보세요.”

시말서 한 장으로 끝나고 싶지 않구나, 네가. 아니, 이건 그렇다 치고....... 네 구역에서 발견된 시체에 피가 한 방울도 없었어.”

, 흡혈귀라도 만났나보죠.”

장난 아니야. 한 구도 아니고 다섯 구가 한 장소에서, 피가 한 방울도 없는 상태였어.”

헤에, 진짜 취미 이상하네. 그런데 뭐 딱히 뜸들일만한 이야긴 아니잖아요.”

그게...... 그 시체들 목덜미에 똑같은 상처가 있었어. 송곳니에 물린 것 같은.”

푸하, 그게 뭡니까? 진짜 흡혈귀의 짓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유치해.”

장난 아니랬지. 그것 때문에 지금 난리라고. 그런데 너는 이런데서 땡땡이나 치고 있고. 네 구역에서 나왔다고, 이 자식아.”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에 소년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정말 말 그대로 이상한 시체이긴 했다. 한 장소에서 다섯 구의 시체가 피 한 방울 남아있지 않고 발견된 경우는 살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제야 남자가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린 이유가 납득이 갔다. 그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건만, 정작 구역의 담당자가 땡땡이를 치고 있었으니 화가 날 만 했다. 그제야 소년은 개미 눈곱만큼 남자에게 미안해졌다. 아마 남자는 이곳저곳에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해대며 소년을 감싸주면서, 동시에 사건을 수습하느라 꽤나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소년은 피곤해 보이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히지카타씨.”

. ?”

저기 자판기 있네요.”

? , 이게 여기 있냐. 거 참 찾아도 없더니만.”

 

남자는 투덜거리며 곧장 자판기로 달려갔다. 그런 남자의 행실에 소년은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02.이상한 사람들과 기묘한 남자

그날은 이상하게 못 보던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가부키쵸 거리를 걸으면서, 웬만한 사람들의 얼굴은 대충 기억하고 있는 소년이었지만, 그날은 유독 처음 보는 얼굴들이 꽤 여러 명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소년은 그저 아주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딱히 못 보던 얼굴들이 수상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유난히 외지인이 많이 놀러왔구나, 싶은 정도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피처럼 진한 붉은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소년의 눈도 붉은색이었지만 어딘가 그 느낌이 달랐다. 소년의 눈이 갈색과 비슷한 느낌의 따뜻한 붉은색이라면 그들의 눈은 이상하게도 차갑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붉은색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들은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거리에 넘쳐나는 유흥거리가 흥미롭다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며 상당히 기분이 업 된 상태였다.

 

거리는 밤이 되면 낮보다 더 요란해졌다. 원래 가부키쵸 거리는 그런 곳이었다. 고운 옷을 입은 유녀들이 길가에 나와 제법 돈이 있어 보이는 사내들을 하나둘씩 꾀러 나와 있었다. 일을 마친 사람들은 술집이든, 도박장이든, 어디로든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 사람들 틈에 섞여 소년은 조용한 일본식 술집으로 발을 들였다.

 

입구에 매달아놓은 방울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주인장이 힘차게 인사했다. 소년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적당히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주인장은 넉살좋게 웃으며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이 이런데 오는 거 아니야.”

그 소리 싫다고 했잖아요.”

녀석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벌써부터 술을 찾아?!”

다 컸다고요. 조금 있으면 스무 살인데.”

경찰을 상대로 미성년자한테 술장사 하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인간은 아마 나밖에 없을 거다.”

친분 있는 경찰이니까 그럴 때 써먹는 거죠.”

말이나 못하면.”

 

주인장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소년을 보면 지방에 있는 아들놈이 생각이 난다며 언제나 소년에게 잘 해주던 사람이었다. 해서 소년은 이곳을 자주 들리는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많이 없는 가게치고는 음식 맛이 꽤 괜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플러스 옵션으로 주인장은 소년의 훌륭한 말상대이기도 했다.

 

난리가 났다면서?”

역시 알고계시네요.”

이 근방에서 발견된 거니까.”

아아, 하필이면 재수 없게 제 구역이지 뭐에요. 니코틴귀신이 절 잡아 죽이려 든다니까요?”

하핫, 히지카타군도 잘 있나? 그 친구는 요새 통 안보이네.”

알게 뭐에요. 일과 결혼한 사람인걸.”

 

소년이 입술을 삐죽이며 앞에 놓인 어묵을 집어 먹었다. 주인장은 피식 웃으며 소년의 앞에 작은 잔과 술병을 내려놓았다. 소년은 비어있는 잔에 냉큼 술을 따랐다. 술을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술이 당겼다.

 

며칠 전에 발견된 다섯 구의 시체 덕분에 소년은 눈코 뜰 새 없이 일해야 했다. 귀신같은 제 상관에게 보고서도 올려야 했고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몇 번이나 조사도 진행해야 했다. 또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붙잡고 수상한 점 같은 것이 있냐고 물어보기도 해야 했다. 틈틈이 수상한 구석에서 잠복 하는 것은 당연히 따라붙는 옵션이었다. 하여튼 일이 폭풍처럼 휘몰아쳐서 제대로 쉴 틈이 없었다. 오늘도 겨우 짬을 냈을 뿐이었다. 외부에 일이 있어 파견되었던 부대원들이 복귀를 한 탓이었다. 덕분에 일손에 여유가 생겨 지금 소년이 이렇게 않아 따뜻한 어묵 국물과 술 한 잔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소년은 주인장에게 쫑알거리며 불만거리들을 털어 놓았다. 주인장은 낄낄거리며 소년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떠든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가게 안에는 소년과 주인장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소년은 다 식어버린 어묵 국물을 한 수저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봐야겠어요.”

나도 슬슬 정리해야겠구먼.”

안녕히 계세요.”

그래, 살펴가라.”

 

소년은 주인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약간은 알딸딸한 기분으로 술집 문턱을 밟았다. 때마침 마주 들어오던 사람과 피할 겨를도 없이 소년은 그와 부딪치고 말았다. 휘청거리며 쓰러질듯 위태롭게 뒷걸음질 치자 주인장이 놀라서 달려왔다. 하지만 완전히 쓰러질 뻔 한 찰나에 부딪친 사람이 재빠르게 소년의 팔뚝을 잡아 중심을 잡아주었다. 덕분에 소년은 볼썽사납게 바닥에 꼬꾸라지지 않아도 되었다.

 

, 미안합니다.”

아니, 이쪽이야 말로.”

 

소년은 강하게 저의 팔뚝을 붙잡은 남자를 흐리멍덩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소년의 팔뚝을 잡아준 남자는 기묘한 백발에 적안을 가진 사람이었다. 곱슬거리는 하얀 머리칼이 이상하게 잘 어울려 소년은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남자는 소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응대하면서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사가 귀찮은 것 같은 남자는 눈동자도 탁해보였다. 얼굴에 의욕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기가 어려웠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소년은 갑자기 팔뚝이 이상하게 서늘하다고 생각했다. 그 탓인지 소년이 약간 비틀거리며 남자의 팔을 제 몸에서 떼어냈다. 남자는 순순히 소년의 팔을 놔주었다.

 

취한 것 같은데, 조심하라고.”

 

중저음의 목소리가 소년에게 향했다. 소년은 꾸벅 목 인사를 하고 비틀거리며 완전히 술집을 빠져나갔다. 남자는 소년이 나간 자리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이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인장은 어정쩡한 자세로 멍하니 서있다 황급히 남자를 뒤돌아보며 인사를 했다.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소년이 남기고 간 술병을 슬쩍 흔들어 보고 있었다.

 

주인장은 소년을 마지막으로 장사를 정리하려 하던 마음을 고쳐먹고 마지막 손님을 향해 넉살좋게 말을 걸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손님이 없기도 해서 벌이가 시원찮았기 때문에 그는 한 사람의 손님이라도 더 받는 것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 좋다고 생각했다.

 

“‘그걸로 드릴까요?”

아아, 신선한 걸로 줘.”

...... 잠시만 기다리십쇼.”

 

주인장은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산스럽게 남자가 주문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찬장을 한참을 뒤지던 그는 소년이 마시던 술병과 똑같이 생긴 병을 찾았고 이내 남자에게 넘겼다. 남자는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바(bar)에 올려 두고 천천히 일어섰다. 마시고 갈 생각이 없었던 모양인지 느긋하게 손을 흔들며 가게를 빠져나갔다. 주인장은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가게 정리를 시작했다.

 

*

 

소년은 술이 센 편이 아니었다. 아니 외려 약한 쪽에 속했다. 그런데도 술을 마시는 이유는 적당히 취기가 오르기 시작할 때 느끼는 알딸딸한 기분 때문이었다.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 소년은 필요 이상의 술은 마시지 않았다. 적당히 반병정도 마시면 그 뒤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양이 조금 과했던 모양인지 비틀거리는 모양새가 누가 봐도 술에 취한 사람 같아 보였다. 살짝 속이 매스꺼운 것 같기도 했다. 어서 둔영으로 돌아가서 드러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나가는 경찰차라도 한 대 있으면 좋을 텐데. 소년은 인상을 쓰며 거리를 둘러보았지만 경찰차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은 꼼짝없이 걸어서 둔영까지 가야 할 것 같았다. 소년은 몰려오는 피로함과 취기에 못 이겨 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피로는 둘째 치고 일단 취기라도 좀 가라앉아야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은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품속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일단 저가 어디에 있는지는 보고를 해야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마침 휴대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지금 빨리 둔영으로 돌아와라.”

“...히지...카타씨?”

다른 구역에서도 이상한 시체들이 발견됐어.”

아아, .”

 

어쩐다. 소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고개를 폭 숙였다. 걷기엔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빨리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인데.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헤집으며 낮게 신음했다.

 

그런 소년을 백발의 남자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스쿠터에 앉아 핸들에 턱을 괸 상태로 시선 한 번 흩트리지 않은 채였다. 스쿠터는 소년으로부터 약 1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남자는 소년의 통화내용을 듣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곧 남자는 천천히 스쿠터에서 일어나 소년을 향해 걸어갔다. 터덜터덜 걷는 모양새가 무기력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힘이 없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소년은 남자가 저를 향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남자는 찢어져라 하품을 해대며 소년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어이.”

 

소년은 저를 부르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검지를 들어 소년의 정수리를 쿡 지르며 다시 한 번 소년을 불렀다.

 

이봐.”

 

소년은 누군가가 제 정수리를 찌르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을 들었을 때 소년의 시야를 메운 것은 조금 전 그와 부딪쳤던 기묘한 백발의 남자였다. 남자의 하얀 머리칼이 이따금씩 미세한 바람에 나풀거리는 느낌으로 흔들거렸다. 소년은 멍한 얼굴로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남자는 이번에도 소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데서 잠들면 무서운 아저씨들이 잡아간다.”

 

남자는 다시금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맹한 동태눈깔을 하고 세상에 관심이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무서운 아저씨가 형씹니까?”

얼굴은 귀여운데 성격은 그렇지도 않구먼.”

 

소년은 놀랍다고 생각했다. 히지카타를 제외하고 저를 이렇게 단박에 파악한 사람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얼굴만 보고 저를 판단해버리기 때문에 성격이 나쁜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얼굴 값 한다.’는 정도. 하지만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소년을 향해 말했다. 친절을 베풀었는데 말을 왜 그 모양으로 하냐는 얼굴이었다. 소년은 지금 둔영에서 골머리를 썩고 있을 제 상관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집까지 3만원. 어때?”

우와, 바가지.”

취객이잖아, .”

 

남자가 소년의 팔을 잡아끌며 일으켜 세웠다. 소년은 순순히 남자의 이끌림에 붙들려 그의 스쿠터로 향했다. 생각보다 드센 악력에 소년은 휘청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집이 어디야?”

신센구미 둔영.”

뭐야, 너 짭새 였어?”

눈을 엇다 두고 다녀요? 이 제복 보면 다 알지 않나?”

아아.”

 

남자는 힐긋 소년의 몸을 훑었다. 검은색 제복에 흰색 스카프를 답답하게 매고 있는 것을 이제야 본 모양이다.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소년에게 헬멧을 건넸다. 소년은 대충 헬멧을 머리에 얹더니 냉큼 뒷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바가지니 어쩌니 불만스럽게 툴툴거리더니 결국은 타고 갈 생각인가 보다.

 

빨리 가줘요. 안 그럼 나 혼나요.”

그럼 속도위반 딱지 안 뗄 건가?”

전 그렇게 성실하지 않아요. 걱정 말고 빨리 가요.”

좋아.”

 

남자는 헬멧을 눌러 쓰고 소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남자가 무슨 의도로 손을 내밀었는지 3초 정도 고민했다. 그리고 남자를 쳐다보니 그가 귀찮다는 듯 툴툴거리며 말했다.

 

선불이야.”

 

소년은 입술을 삐죽이며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지폐 3장을 남자의 손에 곱게 올려주었다. 남자는 씨익 웃으면서 받아든 3만원을 꾸깃하게 접어 바지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

 

덕분에 소년은 편하게, 그리고 빠르게 둔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서늘한 겨울 밤 공기를 가르며 질주한 스쿠터 덕분에 온몸이 꽁꽁 얼어버렸지만 빨리 돌아왔다는 데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최대한 바람을 피하기 위해 남자의 등 뒤에 딱 달라붙어 있었지만 이상하게 온기를 느낄 수는 없었다. 소년은 추위에 발발 떨며 스쿠터에서 내렸다.

 

덕분에 일찍 왔네요.”

덕분에 3만원 잘 쓸게.”

 

그들은 서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남자의 말에 소년이 피식거리며 웃음으로 답했다. 그러자 남자도 킬킬거리며 습관적으로 배를 긁어댔다. 그리고 소년이 남자에게 꾸벅 목 인사를 하고 둔영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소년의 뒷모습을 꽤 오랫동안 바라보다 스쿠터를 돌려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찬바람덕분에 술기운이 완전히 깬 소년은 서둘러 히지카타의 집무실로 향했다. 몸에서 술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정신은 말짱하니 되었다. 때마침 품속에서 휴대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히지카타일 것이 뻔했다. 소년은 전화를 받지 않고 히지카타의 집무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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