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奇談)

 w.희삼

 

 

 

07.제보

흔한 인상의 남자가 검은색 가방에 한가득 들어있는 수혈용 팩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주시하던 또 다른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하얀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흔한 인상의 남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좀 조심해줬으면 좋겠어. 쥐새끼들이 들쑤시고 다닐 것 같거든.”

“그럼 이번 대금은 어떻게?”

“됐어. 이번 달은 아무래도 자네가 힘들어 질 것 같으니까. 그 수고비로 생각하지.”

“이거...아무래도 제가 손해 보는 장사 같은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준비하지 않았나? 엉뚱한 방향으로 살짝만 틀어놔. 그걸로 충분하니까.”

“뭐, 받은 만큼은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흔한 인상의 남자는 봉투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이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서둘러 차 트렁크에 검은색 가방을 넣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봉투를 건넨 남자는 나른한 얼굴로 멀어지는 남자의 차를 쳐다보다 이내 발길을 돌렸다.

 

남자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는 춥지도 않은지 얇은 자색 유카타 한 장을 걸친 채였다. 창백해 보이는 얼굴과 싸늘한 눈동자가 인간과는 조금 다른 모양새를 한 것처럼 보이게 했지만 백발의 남자가 그러하듯 크게 다른 것은 느낄 수는 없었다. 외려 입가에 희미한 조소를 띄운 얼굴이 무언가 신나는 일이라도 있어 보였다. 그러다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도 없는 컴컴한 골목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허공에 대고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말하기 시작했다.

 

“또 훼방 놓으려고 그러나? 뭐, 마음대로 하도록 해. 그편이 더 재밌을 것 같으니까.”

 

말을 마친 남자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가던 길을 천천히 걸었다. 남자가 골목에서 모습을 감추고 한참이 지나서야 웬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씁쓸한 얼굴로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도 발길을 돌려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

 

소년이 눈을 뜬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해가 중천에 뜬 모양인지 방 안은 불을 켜 놓지 않아도 밝았다. 그는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소독약 냄새가 밑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니 제 상관에게 그의 잇자국을 들킨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쓰러지기 직전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는 것 하나 뿐이었다.

 

소년은 손끝으로 목덜미에 붙여진 거즈를 더듬었다. 면적이 그리 넓지 않을 걸로 보아선 생각보다 상처부위가 작은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섰다. 하얀 거즈에 불그스름한 핏자국이 보였다. 대충 붙여진 꼴을 보아하니 상관이 응급처치를 한 모양이었다. 소년은 짜증을 내며 거즈를 떼어냈다. 목덜미에 선명하게 보이는 ‘그 남자’의 잇자국은 그와의 일이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차라리 계속 잠이나 잘걸. 소년은 밀려오는 짜증과 수치스러움에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세상에 이처럼 기가 막힌 일이 또 있을까.

 

“......짜증나.”

“내말이.”

“-!!!”

 

불현듯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년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저의 혼잣말에 기쁘게 긍정의 의사표현을 한 자는 지금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인 제 상관이었다. 소년은 인상을 쓰며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좀 씻고 오는 게 어때?”

 

이대로 도망칠까? 소년은 상관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최대한 착한 어린이처럼 굴어야 뒤탈이 없을 것이다. 약아빠진 생각을 하며 소년은 주섬주섬 속옷을 꺼내들었다.

 

“씻고 올게요.”

“도망치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사람이 싫다, 싫다 하면 정말로 싫어진다고 했던가. 하여튼 눈치는 더럽게 빨라서 도망칠 여지까지 단박에 잘라버린 상관이었다. 소년은 한숨을 쉬고 비척대며 방을 나섰다. 뒤통수에 따라붙는 상관의 눈초리가 못 견디게 짜증났다. 그러나 불평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가는 길에 팍 쓰러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저는 참 잘 자고 일어났다. 소년은 저가 씻고 돌아왔을 때쯤에 하늘이 도와 상관에게 일이 생겨버리길 간절히 기도했다.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

 

“......뭐, 그렇게 된 겁니다.”

“......”

“못 믿겠지만 어쨌든 제가 죽지 않았으니까요.”

“확인을 해봐야겠어.”

“거짓말 하는 거 아니에요.”

“네가 거짓말을 한다는 소리가 아니야.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믿기 힘든 것뿐이지.”

 

상관에게는 기묘한 남자와의 만남부터 그를 의심하게 된 계기까지 모조리 설명했다. 어쩌다가 얼굴을 몇 번 마주친 것뿐인데 기묘한 남자가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던 점, 제 입이 아니고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일을 마치 옆에서 들은 것 마냥 지껄여 대던 점, 보란 듯이 제 사무실의 명함을 경찰인 저에게 건넨 점 등을 설명하며 사람 같지 않았다고.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히지카타의 얼굴에 떠오른 황당함은 이내 곧 진지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에게 목덜미를 물리고 피를 빨렸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땐 상관의 얼굴이 경악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해결사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은 상당부분 각색되어 히지카타에게 전달되었지만(차마 남자한테 강간당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몸을 씻는 내내 상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했다. 어쨌든 치욕스러운 일은 상관에게 들키지 않고 중요한 정보만을 잘 추려서 전달한 듯싶었다. 다행이다. 소년은 그나마 치욕을 감추는데 성공한 것을 하늘에 감사했다.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어제의 치욕은 저와 ‘그 남자’ 이외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럼 다녀오세요. 전 순찰 나가 볼게요.”

“무슨 소리야?”

“네?”

“넌 오늘부터 모든 업무에서 제외야. ‘기밀’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근신하는 걸로 처리해뒀어. 이 사건에 집중해.”

“뭐, 뭐요? 근신?”

“쓸데없는 일에 신경 끄고 네가 잘하는 걸 하라는 소리야.”

“누굴 베고 오라는 소립니까?”

“네 가장 큰 장점을 이용하라는 소린데 못 알아듣겠냐?”

“......?”

“너 그 자식이랑 안면도 텄겠다, 그 놈은 남자 좋아한다며.”

“그래서요?”

“그 놈이 너 좋다고 안 하든? 네 얼굴 정도면 먹혀들어갈 것 같은데.”

 

뭐?

 

소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앞에 앉은 이 잘생긴 낯짝이 뭐라고 지껄인 것일까.

 

남자의 고상한 취미에 대해서 말한 것이 실수였다. 그냥 간결하게 그 남자가 인간이 아니고 피를 마시긴 하지만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고만 할 걸. 괜히 쓸데없는 부분에서 솔직했다. 망할, 망할!

 

소년은 얼굴을 구기며 강력한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

 

“싫어요! 나보고 남자를 꼬시라고?! 미친 거 아닙니까? 아니, 그리고 그게 지금 부하한테 할 소리에요? 내가 몇 살 인지는 알아요?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나보고 남자를 꼬시래?”

 

소년은 악몽 같던 어제 밤 일이 떠올랐다. 그런 일을 당했는데 그 자와 얼굴을 마주하고 사근사근하게 굴라니. 말도 안 된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소년이 신경질을 내자 히지카타도 덩달아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넌 일이 장난이냐? 내가 너보고 진짜로 남자랑 어떻게 하라고 했어? 그냥 좀 착하게 굴어서 정보를 캐오라는 거잖아! 좀 몇 번 웃어주고 비위 맞춰 주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어?! 사건을 접으라고 할 때 그따위로 패악을 부리더니 이제 와서 왜 딴소리야?”

“그래도 그 인간이랑은 말 섞기 싫어요! 그래, 당신이 하면 되겠네. 히지카타씨가 해요. 그 남자, 나보단 히지카타씨 쪽이 더 취향일걸?”

“너 그 자식이랑 뭔 일 있었지?”

“그런 거 아닌데요.”

“그럼 왜 그렇게 정색을 하고 지랄이야?”

“그거야...그 인간이 나, 남잘 좋아한다고 하니까 본능적인 거부감에...”

“그래서 그 새끼가 너 어떻게 해보고 싶다디?”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그럼 알아들은 걸로 알고 난 이만 가본다.”

“아, 진짜...”

 

소년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자 히지카타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핀치에 몰려 당황하는 부하의 얼굴을 보니 귀엽기도 하고 좀 더 놀려보고도 싶었지만 더 건드리면 저 물건은 또 삐딱 선을 탈 것이 분명했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면 좀 곤란하겠지만, 저게 생긴 건 귀여워도 쉽게 건드릴 물건은 아니니까. 그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소년의 방을 나섰다. 그러다가 깜빡 잊은 말이 생각 난 모양인지 발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 놈이랑 약속 잡아놔. 한 번 보긴 봐야할 것 같으니까.”

 

*

 

재수가 없으려니. 하고 넘어가기엔 참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번 다시 그 남자와 얼굴을 마주 하고 싶지 않은데, 이제는 아주 친하게 지내라니. 아무리 일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상황이다 싶어 소년은 앞에 놓인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끝까지 못하겠다고 우겨대면 남다른 촉을 가진 상관이 무엇인가를 알아챌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 그 누구도 그와의 일을 알아선 안 된다. 그것은 남자의 자존심 문제이기 이전에 한 개인의 치부가 드러나는 문제였다. 쪽팔리게 남자가 남자한테 강간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억울하지도 않다. 계집애처럼 훌쩍거리며 피해자요, 당당하게 원망을 쏟아 부어 낼 수도 없다. 아직도 그와의 일을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지고 똥꼬가 아려오는데, 그 미친 자의 얼굴을 보고 살살거리며 웃을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소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쥐고 있던 젓가락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그러자 앞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부대원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키타 대장, 어디 아프십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으려고. 신경 끄고 마저 드셔.”

“근신처분 때문에 그러십니까? 부장님이랑 또 싸우셨죠?”

“그런 거 아니야.”

“에이-”

“......밥이나 마저 먹어라. 난 간다.”

“에?”

 

맥없는 오키타의 반응에 부하는 당황하며 넋을 놓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협박과 폭력을 동원해서 입을 막았을 그였건만, 오늘따라 영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축 늘어진 어깨가 진짜로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부하는 이내 다시 밥에 집중했다. 아무렴 어떠랴. 이번에는 부장이랑 좀 심하게 싸운 거겠지.

 

역시 그래도 한 대 정도는 때려줄 걸 그랬다. 소년은 식당을 나서며 생각했다. 아니, 그러면 뭘 해. 결국 그자와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데.

 

그러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어기적거리며 일을 미루었다간 정말로 못하겠다고 히지카타에게 징징거릴 것 같아 소년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검이나 한 자루 더 챙겨서 나가야겠다. 혹시 모를 2차 범죄의 예방을 위해서.

 

**

 

‘잘못한 걸까? 잘못한 거겠지.’

 

해결사 사무실 소파에 드러누운 사카타 긴토키는 깊은 후회와 반성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인간으로서는, 아니 인간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으니 대충 그 범주라 치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저가 생각하기에도 참 이례적인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때까지 한 번도, 그 어떤 경우에도 싫다는 사람을 붙들고 그런 짓을 저질러본 적이 없는 저였다. 막말로 변태도 아니고, 저 좋다고 달려드는 사람도 많은데 굳이 싫다는 사람을 붙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취향의 남자였다고는 하지만 정도가 심하지 않았나.

 

종종 식욕과 성욕이 겹쳐져 착각을 할 때가 있었다. 희한하게도 타인과 몸을 부대낌으로 해서 목이 타들어갈 것 같은 갈증이 잠시나마 억눌러진다. 그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일부러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때에는 저가 나서서 상대를 찾기도 했다. 얼마안가 허기를 억누르는 방법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수혈용 팩을 사들이는 방식을 택하긴 했지만 꽤나 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분명히 소년과의 일이 있기 바로 직전에 수혈용 팩을 2개나 뜯지 않았던가. 소년과 몸을 부대끼면서 느꼈던 그 미칠 것 같은 흡혈의 욕구와 성욕은 분간을 하지 못할 정도로 저를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 아찔한 기분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위험하다고 스스로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그 소년이 취향인거냐. 스스로를 향해 한심하게 되묻고 있었지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아아악!!!”

“시끄럽다, 해. 할 일이 없으면 나가서 일이나 찾으라, 해!”

“카구라? 있지, 내가 말이지. 엄청, 엄청, 엄청! 큰 실수를 했거들랑? 그것도 상대한테 무지하게 피해주는 실수를. 사과....해야겠지?”

“상대방을 고자라도 만들었냐, 해? 그런 거 아니면 그냥 쿨하게 사과하고 엎드려 빌어라, 해.”

“......”

“진짜 고자를 만든거냐, 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아냐, 됐어. 더 말하지 마.”

“......긴쨩.”

“말하지 말라니까.”

“최악이다, 해.”

 

그렇다. 최악이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고민해도 저는 최악이었다. 아무리 정체를 들켰어도 적당히 입막음 시키고 말았어도 될 일이었다. 그 소년이 아무렇게나 저의 정체를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철딱서니가 없어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는 것 같지도 않았다. 꼭 그런 방법이 아니었더라도 소년의 입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는 소리다. 그냥 정체가 발각됐을 때 순순히 취조나 좀 당하고 말았으면 이렇게 마음이 쓰이지나 않지. 어차피 사람을 죽였다는 결정적인 증가가 없으니 이것저것 좀 귀찮아 지다가 말 거였는데.

 

“카, 카구라아?”

“좀 조용히 해라, 해. 드라마에 집중을 못하겠다, 해.”

“어른이 어린애를 건드리면 벌 받는 거지? 응?”

“애를 건드린 거냐, 해?”

“......”

“긴쨩.”

“마, 말하지 마. 알겠어, 말하지 말라고!!”

“......나까지 여자로 보면 거시기를 작살내 주겠다, 해”

 

그러면서 슬금슬금 엉덩이로 후방 전진을 하고 있는 소녀였다. 그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도 안 나온다. 사카타 긴토키, 인생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남자는 깊은 시름과 함께 다시 소파와 몸을 일체화 시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최악 중에 최악인 것 같았다.

 

**

 

“하......”

 

벌써 몇 번째 한숨일까. 앞에 높인 술잔은 텅 비어 있었고 술병에는 술이 가득 차 있었다. 따끈한 어묵 탕은 식어서 미지근해져버렸다. 기분전환이라도 하며 좀 나아질까 싶어 소년은 자주 찾는 가게로 왔지만 혼자라서 그런지 쓸데없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사실은 해결사 사무실까지 가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해결사 사무실로 향하는 2층 계단을 밟아보지도 못했다. 밑에서 한참이나 사무실을 올려다보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그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다. 낯가죽이 두꺼운 건 어느 정도의 상황에서나 통하는 것이고 이것은 질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같은 남성에게 그와 같은 짓을 당하고도 피해자와 얼굴을 마주하며 웃을 수 있으리. 비단 이것은 저의 의지박약 문제가 아니라는 소리다.

 

이 상태로는 이성을 잃고 제 쪽에서 먼저 칼을 뽑아들고 설쳐댈지도 모른다. 뱀같이 제 얼굴과 목덜미를 핥아대던 남자의 혀가 아직도 제 몸을 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손이 제 엉덩이를 더듬던 것을 아직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것은 남자의 성기가 제 몸을 뚫고 들어와 엉망으로 휘젓던 느낌이 절대로 잊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서, 도저히 해결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피 비린내만 맡아도 자연스럽게 그날의 상황이 떠오르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괜히 목덜미의 상처가 따끔거리는 것도 다 그 때문일 것이다.

 

“......거지같아.”

 

소년의 중얼거림에 꼬지에 어묵을 끼우고 있던 술집 주인은 의아한 얼굴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저런 종류의 말은 뱉은 적이 없던 소년이었으니 의아할 만도 했다.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떠맡게 된 거야?”

“......뭐, 그 비슷한 거요.”

“그런 일은 빨리 해치우고 털어버려.”

“그럴 수 있었으면 오죽이나 좋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한숨 쉬면 뭐가 달라지나.”

“그러게요. 한심하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 아저씨가 서비스 할 테니 기운 내.”

“고맙습니다.”

 

소년이 희미하게 웃으며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약간이지만 기운을 차린 소년을 보고 주인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얼마 전에 난리가 났던 그 사건은 어떻게, 범인은 잡힌 거야?”

“잘 몰라요.”

“엥? 네가 이 구역 담당인데 왜 몰라?”

“그날 제가 땡땡이 칠 때 사건이 터졌잖아요. 그거 때문에 전 당분간 근신처분 받았거든요.”

“헤에, 그래도 한 동안은 조사한다고 하지 않았어?”

“저야 뭐, 힘이 있나요. 마요네즈가 손 떼라면 떼야하는 입장인걸요.”

“그럼 이걸 어디다가 제보를 해야 하나. 내가 들은 게 있는데 말이지.”

“네? 뭘요? 뭘 들으셨는데요?”

“괜찮겠어? 근신이라며?”

“도움 되는 제보면 저도 근신에서 해방되지 않을까 해서.”

“어이고, 사고나 치지 마라. 여튼 말이야. 내가 손님들 하는 이야기를 들은 건데, 일이 있던 날 밤에 그 골목에서 카츠라 코타로를 본 사람이 있데.”

“카츠라... 코타로요? 양이지사(攘夷志士), 광란의 귀공자?”

“한쪽에선 그 자가 범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더라고.”

“......”

 

주인장의 말에 소년은 인상을 썼다. 히지카타의 말로는 귀병대와 관련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같은 양이지사라지만 귀병대와 광란의 귀공자는 성격이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다. 둘이 모종의 말이라도 오간 것일까. 그렇다면 그 움직임을 신센구미 쪽에서 잡아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갑작스럽게 난입한 새로운 존재가 완전히 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뒤틀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아직 범인과 범행의 목적을 알 수 없는데, 새로운 인물이라니. 아무래도 사건이 단단히 꼬여버린 것 같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소년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관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먼저일까, 기묘한 남자를 만나는 것이 먼저일까. 어느새 그 남자와 있었던 치욕스러운 일은 머릿속에서 희미해져버렸다. 괜히 쓸데없는 일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아 스스로가 한심해진다. 사건을 파헤치는 것이 먼저였는데, 이때까지 저는 무슨 같잖지도 않는 일로 고민한 것일까.

 

“이만 일어나볼게요. 제보, 고맙습니다.”

“그래.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 살펴가.”

 

소년은 옆에 세워 두었던 검을 집어 들고 술집을 나섰다. 운 좋게도 가게를 나서자마자 길 한구석에 주차되어 있는 경찰차를 발견했다. 그는 뛰는 듯 걸어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확인했다.

 

“카미야마.”

“엇, 오키타 대장!”

 

운 좋게도 1번대 소속 부대원이었다. 소년은 잘되었다 싶어 조수석에 냉큼 올라타 부하에게 명령했다.

 

“이상한 시체가 처음 발견된 골목으로 가. 어서.”

“네? 하지만 대장, 근신처분을 받으셨다고......”

“괜찮으니까, 넌 날 거기 떨궈 놓고 가면 돼. 넌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고. 알아들었으면 출발.”

“하지만 그랬다간 부장한테-”

“내가 운전하리? 잔말 말고 출발해.”

 

소년의 억지스러운 명령에 경찰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속도를 올리라며 운전석의 부하에게 닦달을 하면서 소년은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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