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奇談)

ㅈ.희삼



09.경고


소파에 널브러져 잠든 조그마한 체구의 계집아이를 발로 몇 번 툭툭 건드리던 남자는 이내 흥미가 없어진 모양인지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렇게나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남자가 앉은 바닥과 멀지 않은 곳에는 소녀가 먹다 남긴 과자봉지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과자 부스러기 사이로 개미떼가 몰려 치열한 먹이셔틀을 하고 있는 꼴이 아비규환이다. 남자는 인상을 쓰며 과자봉지를 쓰레기통으로 투척했다. 그러나 여전히 개미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긴, 저것들도 먹고 살려고 치열하게 노동중이니까.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딸기 맛 사탕을 쪽쪽 빨아대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달달한 딸기향이 코끝에서 맴돌았다. 방금 전에 마신 피 냄새가 섞여 올라오는 딸기 향은 배가 부른데도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피 냄새를 맡으면서 쩝쩝거리는 저는 이제 완전히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아닌 것 같은 게 아니라 아니었지.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렸더라? 남자는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렸다.

 

추운 겨울이었던 것 같다. 눈과 비가 섞여 내리던 한겨울 밤, 동료를 모두 잃고 피에 절은 육신을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 라는 표면적인 취지를 내세웠지만 스승을 구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결과는 참담했고,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손에 쥔 검을 놓아버렸더라? 이제는 그 기억도 가물가물해져 쓴 웃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눈이 섞인 비를 맞으며 힘겨운 걸음을 걷고 있었다. 추위에 손과 발이 얼어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눈꺼풀이 자꾸만 감겨 위험하다고 여겼던 순간에 그 모든 일이 벌어졌다.

 

목 안으로 파고드는 날카로운 송곳니의 느낌이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 온 몸이 차게 얼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유독 목덜미는 타는 듯이 뜨거웠다. 남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습격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저를 덮쳤던 그림자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만을 던진 채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나약하긴.’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갈증이었다. 피를 뒤집어썼던 옷에서 올라오는 쇠 냄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검을 뽑아 그 날에 묻어있는 피를 핥았다. 순간 놀라서 검을 바닥으로 내팽겨 쳤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나온다. 그때 참 병신 같았지. 남자는 혼자서 킬킬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남자는 웃음을 멈추었다. 그는 인상을 쓰며 열리지 않은 현관문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마치 누군가가 현관을 열고 들어올 것처럼, 남자는 문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긴토키, 자네 안에 있는가?”

 

신기하게도 남자는 마치 누군가가 올 줄 알았던 것 같아 보였다. 현관문을 노려보는 모양새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귀찮은 얼굴로 어기적거리며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나 문은 열지 않은 채 부름에 답했다.

 

무슨 일이야?”

다카스키가 일을 꾸미고 있네.”

그게 뭐. 열심히 꾸미라고 해.”

여기에 들락거리는 꼬마가 조사하는 일 일거야.”

“......?”

나도 확실한 건 모르지만 조심하게. 노리는 게 꼭 돈만은 아닌 것 같으니까.”

“......”

이만 가보겠네.”

 

희미하게 낡은 건물의 계단이 삐걱 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라졌다. 남자는 심중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는 다시 터덜터덜 걸어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이내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텔레비전을 켜고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부터 텔레비전을 보며 실없이 웃고 있었던 것처럼 남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소리에 죽은 사람처럼 잠들어 있던 소녀가 부스스 눈을 떴다. 그리고 소녀는 그 사내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 장면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저녁의 해결사 사무실이었다.

 


**


내일 시간 되요?”

오전은 좀 바빠.”

약속 잡아 놨어요. 해결사 사무실로 가시면 되요.”

?”

“......전 근신이잖아요.”

까불지?”

 

새카만 눈이 매섭게 소년을 노려보았다. 소년은 떫은 표정을 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정리해봐.”

 

상관의 명령에 소년은 조용히 한숨을 쉬고 이내 입을 열었다.

 

브로커를 찾았어요. 제가 자주 가는 술집 아시죠? 그 집 주인이 부업으로 수혈용 팩을 판데요. 공급자는 따로 있는 모양이에요. 범인과 공급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게 일단은 제 생각인데, 아닐 수도 있어요. , 그리고...지금 생각 난건데 흡혈귀가 해결사 형씨만 있는 게 아닌가 봐요.”

 

소년의 보고에 남자는 인상을 썼다. 소년은 그런 남자의 표정을 살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해결사 형씨한테 가기 전에 그 술집에 들렸거든요. 주인장이 그러더라고요. 사건현장에서 광란의 귀공자를 본 사람이 있다고. 브로커가 살인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해도 공급자, 아니 살인자가 될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사건을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달라는 사주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여요.”

사람 아닌 것들이 또 있다? 브로커에, 흡혈귀에, 거기 얽혀든 귀병대에. 난리도 아니구먼.”

귀병대요?”

무관하다고 보긴 힘들지. 내 생각도 살인자와 공급자는 동일인물이 맞는 것 같아. , 집단이 될 수 도 있지. 귀병대 자체가 공급자이자 살인자일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야.”

 

남자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상관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살인의 규모로 보나 대담성으로 보나 혼자서 이런 일을 저지르기엔 너무한 감이 있다. 확실히 집단이라고 봐야 옳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정부까지 관련되어 있다면 보통 큰일이 아님은 확실했다.

 

소년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피로가 몰려왔다. 해결사 사무실에서 들어서기 전부터 잔뜩 긴장을 한 모양인지 그곳을 나오는 순간부터 탁, 하고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그런 소년을 향해 혀를 차더니 말을 이었다.

 

해결사랑은 좀 친해졌냐?”

호모와 일반인의 그 결코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랄까요?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까불어라.”

“......브로커한텐 손 안 데기로 하고 이만큼 알아 온 거라고요. 이쪽 사정도 좀 봐줘요. 얼마나 애쓴 건데.”

너 지금 돌대가리라고 광고하냐? 이상하지도 않아?”

, 재수 없어. 방금 당신, 진짜 재수 더럽게 없었어요.”

넌 그 흡혈귀 자식이 진짜 이 사건이랑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어? 귀병대 끄나풀 일 가능성도 있단 소리야. 걔가 과거에 양이지사 활동을 한 전적이 있으면 또 어떡할 거야? 그땐 그자식이 완전히 이 일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어?”

“......과연 히지카타씨. 대단하세요.”

빈정댈 기운이 있으면 그 자식 구워삶을 궁리나 해.”

그럴 기운도 없으니 전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내일 두시에 해결사네로 와. 난 순찰 돌고 바로 갈 테니까.”

.”

 


**

 


살풍경한 얼굴이 참 가관이다. 라고 백발의 남자는 생각했다. 같이 올 거라고 말하던 소년은 어디로 가고 어째서 이 시커먼 사내만 제 앞에 앉아 있는지 일단 그는 영문을 몰랐다. 저렇게 인상만 쓰고 있지 않았다면 좀 더 괜찮은 미남이지 않을까, 라고 딴생각을 하며 남자는 하품을 했다. 그런 남자의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검은 제복을 입은 사내의 표정은 시종일관 썩어 있었다.

 

백발의 남자는 저가 먼저 뭐라도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아니면 닥치고 앉아 이 살벌한 미남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려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소년이 상관과 함께 왔다면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도대체 약속을 정한 장본인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설마 고 맹랑한 꼬맹이가 저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런 상황을 연출했다던가. 노리고 그런 거라면 고놈 참 영악하기 그지없다.

 

네가 진짜 사람 죽인 거 아니야?”

 

그러나 남자의 고민은 소년의 상관이 던진 물음에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그의 물음에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웃어? 켕기는 게 있는 건가?”

이봐, 경찰 나으리. 내가 범인이면 네놈 부하가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그 꼬맹이가 네놈한테 내가 사람이 아니라고 떠들게 놔뒀을 것 같아? 증거 인멸은 악행의 필수 덕목이라고.”

 

히지카타는 남자의 말에 웃었다. 그러자 남자가 인상을 썼다. 히지카타의 반응에 외려 제가 기분이 더러워진 모양이었다. 아아. 이 녀석의 부하는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 귀신보단 여우새끼가 훨씬 낫다. 외모도, 성격도, 아니 그냥 전부 다.

 

네 부하는 어디 갔냐? 할 일 하고 빨리 가지? 나도 일 있거든.”

너 백수 아니었냐?”

“......네 눈은 단추 구멍이냐? 들어올 때 해결사 사무실이라고 간판 못 봤어?! ! 문맹인가보지?”

과연......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을 운운한 이유를 알겠다.”

?”

몰라도 돼.”

알고 싶지도 않거든?”

그럼 닥치고 묻는 말에 예, 아니오로 대답이나 해.”

“.........진짜 이게... , 나 너희한테 협조 하는 거거든? .. 말 뜻 몰라? 네놈 자식이 고 따위로 굴면 안 되는 상황이라고!”

 

히지카타는 저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백발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멱살을 잡힌 남자가 지지 않고 히지카타의 멱살을 잡았다.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두 수컷이 으르렁거리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결국 히지카타가 제 성질에 못 이겨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냅다 꽂았다. 그에 남자는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남자는 입 안에 고인 피 섞인 침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히지카타를 노려보는 피색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남자의 눈에서 살기를 읽은 히지카타는 저도 모르게 차고 있던 검으로 손이 갔다. 그러나 그 순간 요란하게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해결사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얼레? 두 분 뭐하십니까?”

 

소년이었다. 그에 남자는 살기를 거두고 짜증어린 얼굴로 소년에게 툴툴거렸다.

 

어디 갔다 이제 와?!”

남편 기다리는 마누라 같은 발언인데요, 형씨.”

용케 이런 재수 없는 새끼 밑에서 일하는구나, .”

, 그걸 형씨가 알아줄지는 몰랐네요. 어지간히 재수 없죠? 그래도 조심하세요. 칼을 제법 잘 쓰거든요. , 형씨라면 목이 달아날 걱정 같은 건 안 하겠지만.”

둘 다 입 다물어.”

히지카타씨도 참. 수사 협조를 받으러 왔으면 좀 유해지세요. 다짜고짜 폭력이라니, 이래가지고 협조 받겠어요?”

네 부하가 너보단 낫다, . 협조 받겠냐? 그래가지고.”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번째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히지카타는 분을 참지 못하고 또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남자도 맞고만 있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복잡하게 뒤엉켜 한참을 서로에게 주먹질했다. 소년은 혀를 차며 소파에 앉았다. 그렇게 둘이 떡이 되도록 치고받으며 한참을 싸운 뒤에 소년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수사를 시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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