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奇談)

 w.희삼

 

 

 

 

08.혼란

쟤는 진짜 물건이긴 물건이다.

 

사카타 긴토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뜯어봐도 저 평온한 낯빛은 가해자를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 혹시 충격으로 일시적인 기억장애를 일으켰다던가. 그렇게 되면 이쪽에서 더 땅으로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데, 큰일이다.

 

“내 말 듣고 있어요?”

“아? 아아, 어.”

 

새치름하게 치켜뜬 저 눈을 보니 일시적인 기억장애 설은 기각. 그렇다고 해도 생각 이상으로 얌전하다. 이건 뭐가 잘못 되도 한참이 잘못된 것 같았다. 분명히 칼을 들고 설쳐도 모자랄 성격임은 분명한데(칼을 들고 설친다면 뱃가죽 한 번 정도는 뚫려줄 의향도 있었다.) 소년이 심각한 얼굴로 사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남자는 영 꺼림칙했다.

 

“양이지사가 관련되어 있다는 형씨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는 것 같아요.”

“잠깐만.”

 

해서 남자는 약간의 의구심과 약간의 양심의 작용에 못 이겨 소년의 말을 잘랐다.

 

“왜 이래?”

 

누가 들으면 남자를 피해자로 오해할 만 한 말이었다. 소년도 그런 뉘앙스를 느꼈는지 급격하게 얼굴이 구겨졌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할 말을 하고 있냐는 얼굴이었다.

 

“형씨야말로 왜 이러십니까?”

“......”

“피해자는 나 아닙니까?”

“......그러니까 묻는 거 아냐.”

“양심 정도는 살아있다, 저한테 고해성사라도 하시려고요?”

 

소년이 한껏 비꼬며 말했다. 그에 남자는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딱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그런 상황이 되어버렸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말짱한 제정신이었고, 실수였다고 말하기엔 스스로가 내키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남자는 고민했지만 딱히 소년에게 할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난 내 일, 좋아해요.”

“......”

“사적인 일 때문에 수사를 망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요.”

 

남자를 매섭게 노려보는 소년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는 공과 사를 혼동하고 싶지 않다는 소년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상한 시체가 발견되었음에도 사실을 은폐하고 거짓으로 평화를 연출하는 상황에 끌려갈 수 없다는 소리였다. 남자는 그런 소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목소리로 소년에게 말했다.

 

“넌 진짜 내 취향인 것 같아.”

 

그러자 소년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소년과 말 할 당시에는 별 것 아니라고 여겼던 일이 지금 와서 보니 한참이나 이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싫어요! 나보고 남자를 꼬시라고?! 미친 거 아닙니까? 아니, 그리고 그게 지금 부하한테 할 소리에요? 내가 몇 살 인지는 알아요?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나보고 남자를 꼬시래?’

 

그렇게까지 발끈할 문제였던가, 저가 했던 말이.

 

‘그거야...그 인간이 나, 남잘 좋아한다고 하니까 본능적인 거부감에...’

 

본능적인 거부감? 웃기고 있네. 남이 뭘 하던 신경도 안 쓰는 놈이 퍽이나 그런 것에 거부감이 느껴지겠다. 아무 생각도 없는 주제에.

 

히지카타는 부하가 지껄였던 말을 곱씹으며 담배 필터를 짓씹었다. 아무래도 뭔가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작정을 하고 파고들면 성질머리 더러운 부하는 분명히 제게 패악을 부릴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그냥 모르는 척 해주기엔 이상하게 찝찝하기도 했고 부하의 유별난 반응이 아무래도 거슬린다. 도대체 부하는 해결사라는 인간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성가신 놈.”

 

진짜, 굉장히, 매우 성가시다. 히지카타는 눈으로는 보고서를 읽으며 입으로는 부하를 씹어댔다. 그러다가 제 짜증에 못 이겨 읽고 있던 보고서를 방 한구석으로 던져버렸다. 히지카타의 앞에 앉은 야마자키는 움찔거리며 제가 올린 보고서를 주섬주섬 주워들었다. 저가 올린 보고서가 상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 다시 올릴까요?”

“......”

 

맹렬하게 허공을 노려보는 히지카타의 눈치를 살피며 야마자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는 머릿속으로 말 안 듣는 또 다른 부하를 생각하느라 야마자키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행동이 야마자키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 어디를...... 고쳐 올까요?”

“......쥐방울 같은 걸 확 팰 수도 없고... 아, 뭐라고?”

“에, 아- 그러니까 보고서가 마음에 안 드신 것 같은데......”

“됐고.”

“그럼 이대로 결제를...”

“나가봐.”

 

야마자키의 말을 냉담하게 잘라먹으며 히지카타는 옷걸이에 걸린 제복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에 얼이 빠진 부하는 상관이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먼저 해결사 형씨부터 알기 쉽게 말하자면, 그는 흡혈을 하는 괴물이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대신 수혈용 팩을 어디선가 사들여 ‘허기(갈증)’를 채우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생긴다. 그는 어디서 수혈용 팩을 사들이고 있는 것일까.

 

다음으로 기묘한 시체에 대해서 알기 쉽게 정리하면, 일단 최근 에도 시내 곳곳에서 발견되는 시체에는 피가 한 방울도 없고, 팔뚝에서 여러 개의 바늘자국이 발견됐다. 목덜미에 물린 상처가 있는 시체와 없는 시체가 구분 없이 발견된다는 규칙성 없는 실마리도 발견되고 있다. 가장 큰 공통점은 그 시체가 살아 있을 적엔 귀병대에 속해 있었다는 것. 고로 과격파 양이 단체인 귀병대와 관련, 특히 그 수장과 긴밀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두 번째 의문은 귀병대의 수장은 범인인가, 피해자인가. 또 뽑아낸 피는 어디에 쓰이는가.

 

마지막으로는 술집 주인이 증언했던 광란의 귀공자, 카츠라 코타로. 그날 밤 골목에서 그를 보았다는 손님들의 말은 진실인가. 그렇다면 그는 사건의 중심인가, 우연히 엮인 희생자인가.

 

간단하게 보니 총 세 가지의 의문이 보였다. 이 세 가지 의문이 모두 풀리면 자연스럽게 사건의 진범과 그의 의도, 윗선의 속내까지 한꺼번에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앞에 놓인 코코아를 홀짝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소년의 앞에 앉아 태연하게 수혈용 팩에 빨대를 꽂아 쪽쪽거리던 남자는 생각에 잠긴 소년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알을 굴려 천장으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런 남자의 기이한 행동에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잘못 먹었습니까?”

“......일하는 남자는, 역시 덮치고 싶어서.”

“2차 범죄의 예방 정도는 하고 왔으니 수사에 협조 하시죠.”

“예방? 뭐 십자가라도 달고 왔냐. 미리 말해두지만 마늘이고 십자가고 그런 거 안 통한다.”

“거시기에 칼을 밖아 넣으면, 그것도 재생됩니까?”

“......”

“안되는가 보죠?”

“......되긴...될 걸?”

“실험 한 번 해볼까요, 우리?”

“아서라.”

“자기 몸의 한계를 알아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절대, 알고 싶지 않거든.”

“거 아쉽네요.”

 

남자는 인상을 구기며 다 마신 팩을 아무렇게나 방구석으로 던졌다. 여간내기가 아닌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성격 한 번 더럽게 깔끔하다. 그는 소파에 몸을 길게 누이며 귀찮은 얼굴로 소년에게 틱틱거리기 시작했다.

 

“경찰나리, 그럼 소인이 뭘 어떻게 협조할깝쇼?”

“수혈용 팩은 어디서 사요?”

“......”

“협조 한다면서요.”

“다음 질문.”

“그럼, 누구한테서 사요?”

“......”

“이런 식으로 나올 겁니까?”

“브로커(Broker).”

“그럼 사건의 범인이 팩을 공급하는 공급자일 수도 있다는 소리네요.”

“그거까진 모르지. 난 수요자일 뿐이니까.”

“사람의 피를 모조리 뽑아서 브로커에게 넘기고, 그 브로커가 수요자인 당신한테 판다. 아귀가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누군가 사람을 죽여서 얻은 피를 돈 많은 장사치가 사들여서, 브로커에게 넘기고, 나한테 온다. 는 가설도 있지.”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그럼 브로커가 누구에요?”

“......”

“타깃이 브로커가 아닙니다만.”

 

진짜라니까요? 하고 소년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살짝 인상을 쓰며 입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피를 구하는 통로를 알려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의리라는 것이 있고 상도덕이라는 것이 있는데, 함부로 어디서 샀다고 떠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람을 죽여서 얻은 피든 어쨌든, 불법적으로 피를 유통하는 일인데 떳떳한 일도 아니었고, 그것을 사서 마시는 저도 범법행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상하게 엮여서 도리어 귀찮아질 여지가 충분히 있는 문제였다.

 

“그전에 약속 하나만 하자.”

“들어보고요.”

“살인자만 잡으면 되는 거잖아.”

“글쎄요. 제가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나오면 나도 입 못 열지.”

“......좋아요. 대신 거짓말하기 없기에요.”

 

소년은 이것저것 따지고 재는 남자가 귀찮았다. 물론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소년은 그가 참 양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저에게 말도 못할 수치를 안겨준 주제에 겨우 그까짓 중간 상인 하나를 부는데도 쉽게 입을 열지 않는 남자가 얄미워 저절로 눈이 가로로 찢어진다. 남자는 살벌하게 저를 노려보는 소년을 떨떠름하게 쳐다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처음 만난 술집 기억해?”

“네.”

“그 집 주인이 부업으로 나 같은 사람들한테 팩을 팔아.”

“......그 집... 주인.... 말입니까?”

“이 거리 사람 중엔 나 같은 사람이 꽤 있거든.”

 

저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남자의 말은 소년의 귓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년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아저씨의 말은 거짓이었어. 그는 직감적으로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일종의 연막작전 같은 것을 계획한 것이라면 아귀가 들어맞는다.

 

가게 주인이 ‘그’를 언급했을 때부터 뭔가 어긋나 있다고 생각했다. 뜬금없이 광란의 귀공자라니, 금시초문이었다. 그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한 정보를 일개 상인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는데. 아무리 주워들은 소문이라고 둘러댄다고 해도!

 

이렇게 되면 상당히 복잡해져 버린다. 남자의 말로는 술집 주인이 브로커라고 했지만 그것은 남자에게만 보이는 모습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가 사람을 죽여 피를 얻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다른 이에게 피를 받아 중개무역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게다가 뜬금없이 카츠라 코타로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선 사건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고자 하는 의도도 엿보인다.

 

소년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짜증스럽게 들고 있던 컵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술집 주인은 아니야.”

“네?”

“술집 주인은 진짜 중간에서 물건만 파는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요?”

“딱 보면 알지. 사람을 죽였을 것 같아? 그 사람이?”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나 참.”

 

남자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찾다. 소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말하길 주저하는 듯 하다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너도 사람 죽여 봤으니까 알 거 아냐. 똑바로 사람을 쳐다보는 게 익숙한지, 익숙하지 않은지.”

“......”

 

소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 가장 큰 핵심은 누가 사람을 죽였느냐, 였다. 스스로가 법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을 죽이고 있었으면서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을 놓치고 말았다.

 

소년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저는 지금 왜 이렇게 허술한 것일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저는 남자와 마주앉아 있다는 것 만으로도 평정심을 유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속에서 차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심장 한 구석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겉으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괜찮을 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사소한 부분을 계속해서 놓치고 있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이 봐, 괜찮은 거야?”

“내일 다시 올게요.”

“어이.”

“가 보겠습니다.”

 

소년은 도망치듯 소파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그런 소년을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소년이 신발장 앞에서 다급하게 신발을 신다가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할 말이 생긴 모양이었다.

 

“내일은 재수 없는 상관도 같이 올 거예요.”

“......?”

 

잠깐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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