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奇談)

w.희삼

 

  

 

05.정체

‘이 자가 정말!!!’

 

소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찢어버린 명함의 뒷면에 그려져 있던 간단한 약도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자식, 알고 있었던 거야. 분명히.’

 

소년은 다급하게 달리면서도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날로부터 기묘한 남자는 뜬금없이 제 행동반경 안에서 발견되곤 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 기묘한 사내의 행동반경이 저와 겹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그 자의 집이 사건이 발생한 골목과 인접한 곳에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확률상의 문제이긴 했지만). 바보같이 이런 간단한 것도 묻지 않고 그에게서 받은 악감정으로 수사를 그르칠 뻔 했다. 한심해도 보통 한심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약도상의 그의 집은, 다섯 구의 시체가 발견된 골목을 끼고 있는 건물이 아니던가!

 

민간인에게 최대한 알리지 않고 조용히 수사를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지라 지나가는 사람을 상대로만 간단한 탐문을 했지, 근처의 집은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멍청했다. 실로 엄청난 실수이지 않은가. 이렇게 허술하게 수사를 해놓고 히지카타에게 있는 대로 패악을 부린 것이 민망해진다. 소년은 달리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다급해 미칠 지경이었다. 더불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남자가 명함을 건넨 목적이 단순한 돈벌이를 찾고 있었든 아니든, 그 자는 분명히 저가 경찰임을 알고 있었다. 자기 집 옆 골목에서 시체가 발견된 것을 그 기묘한 사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쉬쉬 한다 치더라도 시체가 발견될 당시에 그 일대가 얼마나 소란했었는데. 그 명함이 저를 용의자로 몰 수도 있음을 남자는 모르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에게 명함을 건넨 목적은 무엇일까. 단순한 도발? 아니면 정보를 쥐고 있다고 유세를 떠는 건가? 소년은 속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에 달리기를 멈추었다. 무릎을 짚고 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그 문제의 골목에 다다라 있었다. 그곳은 기묘한 남자의 해결사 사무실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놓칠 수는 없지.’

 

소년은 건물의 2층에 자리한 해결사 사무실 간판을 쏘아보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애당초 초인종을 누를 생각도 노크를 할 생각도 없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쳐들어간다.’가 가장 올바른 표현일까. 소년은 남의 집에 들어가면서도 예의를 차리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남의 집 침입이 생활화 된 직업이라 그런 쪽의 예의에 대해서는 무덤덤하다. 그러나 소년이 예의 없는 행동을 하기도 전에 기세 좋게 문이 열리더니 소년의 가슴팍으로 단단한 머리통이 돌진했다. 덕분에 일순 숨이 막히는 고통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소년은 짜증을 내며 저에게 돌진한 돌머리를 향해 이를 갈며 말했다.

 

“앞 좀 보고 다니지?”

“너나 보고 다녀라, 해.”

 

이상한 말투의 소녀가 불퉁하게 말을 뱉더니 그대로 소년을 지나쳐 달려 나갔다. 소년은 얼굴을 구기며 소녀가 지나간 자리에 침을 뱉었다. 더 가관인 것은 안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기묘한 사내였다. 귀찮아죽겠다는 얼굴을 하고는 소녀가 달려 나간 방향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이내 다시 들어가 버린다.

 

소년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 남자를 따라 해결사 사무실로 따라 들어갔다. 남자는 그런 소년을 신경 쓰지 않고 냉장고에서 딸기우유를 꺼내 마셨다. 소년 또한 개의치 않고 소파에 앉았다.

 

남자가 느릿하게 걸어 소파에 다다랐을 때, 한 손에 든 커피 잔에서는 달달한 코코아 냄새가 풍겨왔다. 소년은 그에게서 냉큼 커피 잔을 빼앗아 홀짝이며 코코아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남자는 습관적으로 배를 긁으며 맞은 편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손님을 제대로 접객할 의사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소년은 혀를 차며 먼저 입을 땠다.

 

“봤어요?”

“무슨 말이 앞뒤가 없어? 그따위로 말하면 내가 알아 듣냐?”

“아니면 형씨가 범인인가?”

“하, 참.”

 

남자는 삐딱하게 누워 코를 후비기 시작했다. 뭐라고 지껄여도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소년은 비릿하게 웃으며 다시 질문했다.

 

“내가 경찰인줄 알면서 왜 명함을 준겁니까? 단순한 도발입니까? 아니면 정보를 가졌다고 꼬리를 흔든 겁니까?”

“역시 속에 여우새끼가 들어앉아서 그런지 눈치가 빨라. 너 되게 맘에 든다.”

“묻는 말에 대답하세요.”

“난 돈이 없지만 정보는 있고, 넌 돈은 있지만 정보는 없고. 어때? 건당 싸게 쳐줄게.”

“좋아요. 형씨가 가진 정보를 말 해봐요.”

“‘이상한 시체’를 버리는 사람을 봤지.”

“얼굴도?”

“얼굴은 못 봤지만, 진검을 차고 있었어.”

“......장난해요? 아무런 도움도 안 되잖아.”

“폐도령이 내려졌는데 진검을 차고 있었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소년은 남자의 말 뜻을 단박에 이해했다. 폐도령이 내려진 시기에 진검을 가지고 다니는 무리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경찰, 양이지사, 혹은 센 척 하는 얼간이들. 많이 꼽아봐야 이 세 무리 정도인데, 범행을 저지를 확률이 가장 높은 집단은 아무래도 양이지사들이었다. 속단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확실히 남자의 정보는 수사망을 좁히는데 도움이 된다.

 

확 좁혀진 수사망에도 소년은 무언가가 계속해서 찝찝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묘한 남자의 사무실로 달릴 때부터 엄습했던 불안감과 초조함이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었다. 소년은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으며 앞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싸늘한 적색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기분 나빴다. 쥐고 있는 주먹에서 이상하게 땀이 났다. 도대체 내가 뭘 놓친... 잠깐만. 이상해. 정말로 이상해.

 

“그런데요, 형씨.”

“응.”

“내가......그 ‘이상한 시체’의 범인을 쫓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안거죠? 난, 한 번도 형씨 앞에서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

 

일순 해결사 사무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년은 습관적으로 내려놓았던 검을 집어 들었다. 남자는 자세를 고쳐 잡고 앉더니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어댔다. 소년은 두리번거리며 사무실 내부를 날카롭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급하게 일어서 냉장고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런 소년의 행동에 남자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열지마!”

“......당신이지?”

“그런 거 아니야. 어쨌든 거긴 열지마.”

“......”

 

소년은 남자를 비웃었다. 남자의 반응은 지금 저가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자일까. 소년은 남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뭐...야?”

“문이나 닫아.”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 재낀 소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남자가 다급하게 경고한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냉장고에는 먹다만 1000ml 짜리 딸기우유와 날짜가 지난 치즈, 그리고 달걀 몇 알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소년은 힐긋 남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남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초조함이 서려있었다. 얼른 소년이 냉장고 문을 닫지 않자 신경질이 난 모양이었다.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쥐고 있던 검을 내팽개쳤다. 그와 동시에 다리에 긴장이 풀리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거칠게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소년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운 뒤, 소파로 끌고 와 앉혔다. 남자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이랑 엮일 생각을 하다니, 나도 미쳤지.”

“......”

“나가. 너 상대론 장사 안 해.”

“나도 형씨같이 찝찝한 사람이랑은 거래 안 해요.”

 

소년은 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탁자위에 5만원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결사 사무실을 나갔다.

 

남자는 탁자에 놓여진 5만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속에서 미칠 것 같은 갈증이 올라왔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엌으로 향했다.

 

*

 

소년은 해결사 사무실 문을 거칠게 닫으며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헤집는 손에서는 짜증이 묻어났다. 남자에게 물어야 할 것이 산더미였지만, 방금 전의 태도로 보아선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기세였다. 더군다나 범인일지도 모를 남자였고 믿을 수도 없었다. 방금 전 남자에게 들은 정보도 진실여부를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소년은 한숨을 쉬며 천천히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거리는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해결사 사무실 밑에 자리한 허름한 술집은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하려는 모양인지 안쪽이 분주해보였다. 소년은 기운 없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둔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

 

익숙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시체가 발견된 골목길 벽 쪽에 삐딱하게 붙어선 저의 상관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소년은 제 상관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알아낸 건?”

“수사 하지 말라면서요.”

“그래서 포기했냐?”

“......당신, 재수 없어.”

“죽은 놈들은 죄다 귀병대 소속. 며칠 전에는 그 우두머리가 위쪽 선에 접촉했지.”

“히지...카타씨.”

“하여튼 쥐방울만한 게 말은 더럽게 안 듣지.”

“......듣는 쥐방울, 기분 나쁘네요.”

“넌 왜 저런 곳에서 기어 나와?”

“확실하진 않지만 이번 건과 연관이 있는 건 장담할 수 있어요.”

 

소년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히지카타는 그런 소년의 반응에 인상을 썼다.

 

“증거가 없군.”

“심증은 있어요.”

 

히지카타는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길바닥에 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소년은 명령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옆에 두는 게 더 큰 사고를 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 시한폭탄 같은 놈이 혼자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다간 무슨 사고를 칠 지 모른다. 해서 들쑤시고 다니는 것을 저의 허락 하에 두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런 결론을 내린 것에 무수한 단점이 존재했지만 딱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그것은 보란 듯, 지금처럼 쓸 만한 정보를 물어온다는 것이었다. 확실하게 감을 타고 난 녀석이라 그런지 이쪽 방면으로의 일을 맡기는 데에 소년보다 안심할 수 있는 상대는 몇 없었다. 결국은 앞이 보이지 않는 위험한 도박판에 소년을 끌어들인 꼴이 되었지만, 그는 절대로 소년에게 해가 가는 일은 생기지 않게 할 작정이었다.

 

“해결사라. 저 놈은 귀병대 소속인가?”

“그런 느낌은 없었어요.”

 

소년이 제복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히지카타는 소년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의 물음에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년은 남자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냉장고를 열었을 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초조해 보였던 남자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텅 빈 냉장고를 보여주기가 민망했다고 하기엔 그는 필요 이상으로 뻔뻔한 자였다. 스스로도 저는 ‘돈이 없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으니 무얼 더 말하리. 다급하게 냉장고를 닫는 그 행동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숨기는 건 없었어. 소년은 꼬리를 물고 무한정 반복되는 질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히지카타는 깊게 생각에 빠진 부하를 별 일이라는 듯 쳐다보았다. 무슨 심각한 고민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년은 아주 어릴 적을 제외하고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은 하면서도 건성이다. 거기다 지나가는 행인과 부딪히기까지 한다. 별 일이 다 있다 싶어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느꼈는지 소년이 저를 올려다본다.

 

“왜요?”

“아니.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거짓말하고 있네. 히지카타는 피식 웃으며 소년의 말을 맞받아쳤다.

 

“그럼 너, 검은 엇다 버리고 왔냐?”

“네?”

“네 검.”

 

자신의 말에 소년의 얼굴이 구겨졌다. 별로 말실수를 한 것 같지는 않은데 필요 이상으로 기분 나쁘다는 얼굴을 한 소년이 이상했다. 소년이 신경질 적으로 머리칼을 헤집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먼저 가세요. 검 찾아서 갈게요.”

 

그리고 소년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갈증이 남자를 덮쳤다. 남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냉장고 과일 칸을 열어젖혔다. 냉장고 과일 칸 안에는 거무죽죽한 색의 수혈용 팩이 대량으로 쌓여 있었다.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팩을 뜯어 내용물을 빨아먹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들이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갈증을 해소해 주고 있는 듯 했다. 얼마안가 ‘그것’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은 남자는 욕을 지껄이며 쓰레기통에 빈 팩을 집어 던졌다.

 

억지로 잡아 뜯은 팩 때문에 남자의 손과 옷은 온통 ‘그것’으로 칠갑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외려 손에 묻은 내용물을 아깝다는 듯 샅샅이 핥아먹기 시작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한 호흡을 되찾았다. 벌벌 떨리던 손도 어느새 떨림을 멈추었다. 그러나 남자의 눈동자는 ‘그것’을 마시기 전보다 더 흉측한 빛을 내고 있었다. 남자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과일 칸 안의 수혈용 팩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최근에는 이런 주기가 더욱 짧아졌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자 이 주일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그러다 3일에 한 번. 이제는 하루에 한 번, 그마저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욱 짧아지곤 했다. 이 타는 듯 한 갈증과 숨 막힘은 ‘그것’ 없이는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그것’ 없이 버티고자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타이르며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얼마나 발악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인내는 오래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 밑에 쓰러져 죽어있던 여자의 몸뚱이를 저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일 이후로 남자는 절대로 갈증을 참지 않았다. 차라리 ‘그것’에 의존하여 얌전해질 수 있다면 남자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바꿀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남자는 냉장고 문을 닫으며 들고 있던 수혈용 팩을 흔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모서리 부분을 찢어버리고는 게걸스럽게 내용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입가를 타고 흐르는 거무죽죽한 ‘그것’이 옷깃을 적셨지만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얼마안가 팩을 비운 남자는 쓰레기통에 빈 팩을 던져 넣고 천천히 소파로 발걸음을 옮겼다.

 

[탁-]

 

찬찬히 걸음을 옮기던 남자의 발밑에서 무언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년의 검이었다. 남자는 곤란한 얼굴을 하고는 제 발밑에서 구르고 있는 소년의 검을 집어 들었다. 하여튼 칠칠맞지 못하기는. 남자는 입가에 묻은 ‘그것’을 할짝이며 소년의 검을 소파로 집어 던졌다. 때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렸다. 꼬마가 돌아왔나. 남자는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카구라, 일찍일찍 좀 다녀라?! 아님 아예 신파치네서 자고 오던가!”

“......죄송합니다만, 제 검을 찾으러 왔는데요.”

 

뜻밖의 목소리에 남자는 굳어버렸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여기서 저게 왜 튀어나와?! 남자는 황급히 입가를 훔쳤다. 옷깃에 묻은 ‘그것’의 냄새가 나지 않을까? 남자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소년을 등지고 섰다.

 

“소파 위에 있어. 가져가.”

“네.”

 

타박타박, 소년이 발을 떼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더 저와의 거리를 좁혀오자 남자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아까도 잘 숨겼으니 괜찮을 거라 애써 위로해보았지만 불안한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소년이 걸음을 멈추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이 검을 집어든 것 같았다. 남자는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이제 된 건가. 그러나 그 순간 번개 같은 속도로 소년이 검을 뽑아 남자의 목에 검 날을 들이댔다.

 

“......뭐 하는 짓이야?”

“형씨야말로 이번에도 날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미세하게 검 끝이 떨렸다. 소년의 팔이 떨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남자는 맨 손으로 검을 잡고 그대로 내팽겨 쳤다. 그러자 소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방 안에서 진동하는 피 냄새에 대해 설명해봐.”

 

소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는 도저히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속도로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어둠속에서 빛나는 그의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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