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희




04. 주종관계

밤공기가 차가웠다. 한 겨울의 밤은 언제나 이렇듯 지독한 냉기로 사람을 괴롭게 했다. 소년은 얼어붙은 손을 쥐었다 피며 일부러 손톱 끝을 손바닥에 찍어 누르듯 움직였다. 그렇게라도 해야 어떻게든 손에 감각이 돌아올 터였다. 몰아쉬는 숨에 입김이 시야를 가렸다. 소년은 전방을 주시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어디에서 올까. 소년은 자세를 낮추며 허리춤에 찬 검을 잡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곤 얼음을 부셔 갈아놓은 듯한 냉기만이 전부였다.


착각인가?’


소년은 자세를 바로 잡으며 눈으로 전방을 살폈다. 그러나 여전히 손은 검의 손잡이를 잡을 채였다. 소년은 언제라도 검을 빼어들 준비를 하며 천천히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얼어붙은 흙더미가 소년의 무게에 파사삭 내려앉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기분 나쁘리만치 조용한 거리였다. 소년은 알고 있었다. 이런 적막과 고독이 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유를. 그 사내가 지금 이 곳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지만 사내가 원하는 표적이 소년 자신이라는 것도.


해가 지면 날 찾는 걸 허락할게.’


확실히 영문 모를 소리였고, 저에게 남은 기억은 저 말 한 마디가 전부였다. 또 기억을 통째로 날려버린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랬다. 남자의 마지막 말을 기점으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저는 제 방 안에서 팔자 좋게 잠을 청하고 있던 꼬락서니로 정신을 차렸다. 더 웃긴 것은 눈을 떴을 때가 한밤중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남자가 말한 대로 해가 진, 한밤중. 그때부터 어렴풋이 그 남자가 제게 명령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은 그렇게 짐작할 뿐이었지만, 소년은 자신의 추측이 맞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남자의 말에는 무언가 절대적인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거리의 적막과 고독은 결코 우연히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 남자 탓일 것이다.


소년은 두 번째 발걸음을 내딛었다. 다시 한 번 영하를 맴도는 기온으로 인해 작게 떠올라 있던 흙더미가 파사삭 하고 소년의 무게에 의해 가라앉았다. 바로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창백한 손이 소년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소년은 반사적으로 검을 상대방의 심장을 향해 찔러 넣었지만 창백한 손은 여전히 소년의 목덜미를 잡고 있었다. 살덩어리가 검에 박히는 느낌이 소년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아마도 소년의 실력이라면 분명히 심장을 향해 제대로 찔러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을 잡은 창백한 손의 아귀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외려 소년의 숨통을 더욱더 거세게 조여 왔다.


커흑-”

소용없는 거 잘 알 텐데.”

....”

여전히 냄새가 죽이는구나, .”


남자가 소년의 목덜미에 코를 박으며 말했다. 소년은 대꾸하지 못하고 제 목을 조르는 남자의 손을 붙들었다. 제 살까지 할퀴어내며 남자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창백한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달달한 냄새.”

, 허억-”

, 미안. 흥분이 돼서 힘 조절이 잘 안 되네.”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목덜미를 쥔 손을 놓았다. 소년은 뒷걸음질 치며 기침을 하다 꼴사납게 넘어졌다. 물론 검 손잡이에서 손이 떨어진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창백한 손의 남자는 그런 소년을 눈으로 훑으며 제 가슴팍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태연자약하게 검을 뽑아내는 사내 자체도 신기했지만 뽑아낸 검에 뒤이어 솟구쳐 올라야 할 핏줄기가 남자의 가슴에서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도, 남자도 그런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일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도 소년은 제 앞에 서서 여유롭게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존재 자체에 신경을 곤두세울 뿐이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지? 겁나 꼴리거든, 그거.”

“......”

궁금해 미치겠단 표정인데.”

“......”

그렇게 뜨겁게 쳐다보지마. 나 남자도 가능하거든. 조심해.”

변태.”

말하는 꼬라질 보니 뭘 캐러 온 게 아니라 확인하러 왔구만.”

남자는 소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소년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확인은 이미 했고요.”


소년의 말에 남자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소년의 머릴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소년은 남자의 행동에 인상을 쓰며 제 머리칼을 헤집는 손을 쳐냈다.


왜 안 죽을까요? 내가 분명 형씨 심장을 제대로 찔렀는데.”

내가 허락했으니까. 찔러도 좋다고.”

?”

내 종속이 나한테 대드는 걸 허락했다고.”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이해 못 해도 좋으니까, ......너 냄새 죽인다. 흥분 돼.”


남자가 다시 한 번 소년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소년은 일순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소년은 개의치 않은 척을 하며 말했다.


이해 못 하는 이야기 말고, 그럼 내 기억은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내 기억에.”

잊어버리라고 명령했지.”


여전히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의문이 드는 동시에 소년은 제 목덜미에 코를 박은 남자의 분위기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오전에 물어뜯긴 혓바닥과 소름 돋을 정도로 기분 더러웠던 입맞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제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계속해서 그 자세로 말을 이었다.


혓바닥은 다 나았지?”

일단 좀 떨어지시죠.”

도대체 내 피는 왜 마신거야? 운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 뭘 마셔요?”

죽었으면 죽었지, 뭐 하러 쓸데없이 내 피를 마셔서 이 꼴을 하고 사느냔 말이야.”

“......”


소년은 생각에 잠겼다. 뿌연 안개 속을 걸어왔던 지난 3년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남자의 말에 거짓이 없다면 그때 마신 엠플은 이 사내의 피였을 것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면서 어째서 자신을 살려준 엠플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려하지 않았는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문이 일었으나 일단 사소한 궁금증은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눈 앞의 남자였다.


어차피 죽을 거였거든요.”


남자가 예상 밖의 대답에 소년의 어깨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전히 소년의 목덜미에서 올라오는 단내에 흡혈의 욕구를 억누르기 힘들었지만 일순간 남자는 의외의 대답을 한 소년의 말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남자의 이런 반응을 이끌어 낸 것은 태연자약한 말투로 별 것 아니었다는 듯 말하는 소년의 무신경한 태도가 아마 가장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불쌍한 놈 쳐다보듯 보진 마시고. 어차피 죽을 거였는데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난 살고 싶었으니까. 인간이 원래 좀 간사하잖아요. 깔끔하게 죽는 걸 명예로 여겨도 죽을 때가 되면 살고 싶어 별 짓을 다하게 되거든요.”


소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에 처절하리만치 절박했던 소년의 심정이 녹아든 것 같아 그저 담담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더 이상 그를 비난할 수 없어 입을 닫았다.


이제 형씨 이야길 하셔야죠.”


앳된 얼굴이 남자를 향해 웃어보였다. 방금 전까지 제 이야길 하며 남자의 입을 다물게 만들더니 이제는 웃는 낯짝으로 할 말 없게 만드는 곤란한 놈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는 곤란한 얼굴로 뒤통수를 벅벅 긁어댔다.


내 이야기라고 해도 말이야......, 딱히 없다고. 원래부터 이랬고.”

그럼 나한테 한 짓에 대해 이야길 하셔야죠.”

말했잖아. 잊어버리라고 명령했고, 나한테 대들어도 좋다고 허락했다고. 내 피를 마시고 생명을 연명하는 대가야, 일종의.”

“.......그러니까 확실한 건 형씨가 인간이 아닌 건 맞다는 소리네요.”

눈치 빨라.”

흡혈귀예요?”

인간들은 나 같은 놈을 그렇게 부르지.”

내가 흡혈귀 피를 마신거고?”

운이 좋았지, . 대부분은 마시면 죽는다고. 내 피는 독성이 강하거든.”

그래서 난 형씨가 명령하면 복종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피의 계약, 그런 허세 돋는 상황이 지금 우리 사이에 성립된 상태라 이건가요?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거죠?”

피도 맛있는데 똘똘하기까지. 너 아저씨 애인 할래? 난 남자도 가능한데.”


남자는 경박하게 새끼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입맛을 다셨다. 소년은 기겁을 하며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남자는 그런 소년의 반응에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이 힘 빼지 말자고. 어차피 너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 검 휘두르지도 못 해.”

우와, 치사해.”

인간이 좀 간사하잖아.”


소년은 인상을 쓰며 검집에 검을 넣었다. 남자는 찬찬히 무릎을 펴고 일어서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그 손끝을 따라 빤히 남자를 쳐다보았다. 세상만사에 흥미를 잃은 눈동자가 탁한 핏빛을 띄는 것이 불길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제 손을 잡을 것을 강요하는 동작에 소년은 손을 잡아야할지 말아야할지 헷갈렸다. 분명히 아무 의미 없이 내민 친절의 의미일지 모르지만 소년은 함부로 그 손을 잡지 않고 생각했다.


잡아.


소년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제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음산하게 귓전을 때렸다.


친절은 베풀 때 받아들여야지. 엄마가 그런 거 안 가르쳐 주든?”

형씨, 부탁인데. 나한테 제발 이상한 짓 좀 하지 말아줄래요? 진짜 기분 더럽거든요.”

억울하면 내 애인할래?”

전 남잔 상대 안 합니다.”

“......”

“‘명령하지 마세요. 진짜 죽일거야.”

누가 허락해준다냐?”

“......”


소년이 짜증나는 얼굴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강제로 소년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억지로 일으켜 세워진 소년이 비틀거리면서도 남자에게 잡힌 제 팔뚝을 억지로 풀어내었다. 남자는 순순히 소년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어 놓아주었다.


가자. 데려다 줄게.”

됐습니다.”


소년은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대꾸했다. 그러자 남자가 자연스럽게 소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친한 척을 해댔다.


걷는 거 보단 빠를걸.”


남자는 손가락으로 골목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스쿠터가 주차되어 있었다. 소년은 뭐라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어하는 얼굴로 옆에 붙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소년을 보며 남자가 변태같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지금 권유하는 걸까, 명령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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