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념(邪念)

ㅈ. 희삼


06.

소년은 그 뒤로 2박 3일을 내리 앓았다. 좀처럼 오른 열이 내려가지 않다가 갑자기 저체온증 증상이 나타나는 등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아팠다. 소년이 그렇게 앓을 동안 히지카타는 단 한 번도 소년을 찾지 않았다. 한번쯤은 소년의 방을 들여다볼 법도 했지만 한 번을 찾지 않아 진영 내에는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상관이라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오히려 소년은 제 상관의 그런 매정함이 좋았다. 저를 측은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히지카타를 상상하면 속이 꼬여 아픈 몸이 더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지금은 기운이 조금 떨어지는 것 외에 별 다른 문제는 없었다. 벽에 걸린 작은 거울엔 앓다 일어난 흔적처럼 야위어버린 제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이 죽기 직전의 제 누이의 얼굴과 닮아있어 거울을 오래 쳐다볼 수가 없었다.


소년은 느릿한 손길로 제 목덜미를 쓸며 천천히 방을 나섰다. 하도 누워만 있던 탓인지 목이 뻣뻣하게 굳은 느낌이었다. 사실 하루 정도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양심상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이라 아침 브리핑을 나가는 자리가 달갑지 않았다. 그러니 절로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어찌되었건 히지카타와 한 번은 같이 순찰을 돌 예정이었다. 소년은 다다른 문 앞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안 들어가고 뭐하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하여간 양반은 못 될 인사였다.


“지금 막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소년의 뒤쪽에서 히지카타가 팔을 뻗어 문을 열었다. 순간 짓누르듯 담배냄새가 섞인 코롱 향이 소년을 덮쳤다. 소년은 괜한 긴장감에 시선을 땅으로 처박았다. 히지카타는 그런 소년을 보며 의구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아파?”

“......아, 뭐......기운이 좀......”

“많이 안 좋으면 괜히 설치지 말고 들어가 쉬어.”

“괜찮습니다.”

“쯧, 알아서 해라.”


적당한 관심과 무관심의 사이. 소년과 히지카타의 사이는 딱 그 정도였다. 지나치게 감싸지도, 그렇다고 영 풀어놓지도 않는. 자칫 중심을 잘못 잡으면 틀어져버리는 그런 관계였다.


애석하게도 소년의 입장에서는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렴 제 마음을 다 가져간 사내인데 관심과 무관심, 그 중간 어딘가 쯤에서 자신을 대하고 있는 제 상관의 태도에 저 또한 어중간한 태도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소년은 한참이나 입가에 맴도는 말을 골랐다. 그리고 이미 방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은 사내에게 들리지 않을 말을 조용히 읊조렸다.


“너무하네.”


알아서 하라는 별 것 아닌 말에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졌다.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히지카타를 따라 들어갔지만 서운한 마음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가 앓는 동안 머리카락 한 올 비치지 않았어도 이런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얼굴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들으면 이런 사소한 감정들이 넘실대곤 했다. 그래서 차라리 눈에서 보이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 편이 마음만은 더 편하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뒤를 따라 대원들이 소란스럽게 자리를 찾아 들어왔다.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소년은 혼자만의 고독에 잠겼다. 괜스레 제 옆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얼씨구.”


남자는 벤치에 나태하게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앳된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요 며칠 소년을 길거리에서 볼 수 없었던 덕에 남자는 제법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나랑 잘래요? 라는 되먹지 못한 언사로 제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던 주범이 눈에 띄지 않았으니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 일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어째 소년을 보자마자 남자는 다시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분명히 진심이 아니었겠지만 어리석게도 녀석이 진짜로 저와 붙어먹을 생각이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팔자 좋다?”


덕분에 말이 곱게 나갈 수도 없었고.


“부러우면 지는 거예요, 형씨.”


맹랑하게 받아치는 꼬마를 상대로 어른스러울 수도 없었다.


“하나도 안 부럽거든?”


소년은 남자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사람 부아를 돋우는 수면안대를 눈가로 내렸다. 남자는 왠지 모르게 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삐뚤어져야 이렇게까지 사람을 짜증나게 할 수 있을까. 분명 이런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남자는 이를 갈며 소년의 옆자리에 털썩, 소리가 나게 앉았다. 그에 소년이 맹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일이 없으신가 봐요?”

“바쁜 와중에 잠시 쉬어가는 거다만.”

“거짓말.”

“얼라들은 모르는 어른의 사정이라는 게 있거든?”

“아, 예.”


이 빌어먹을 꼬맹이를 어떻게 하면 좋지.


남자는 주먹을 쥔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소년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얄미운 안대로 눈을 가린 반반한 낯짝이 태평스럽게도 하늘을 향해 있었다.


기회다. 한 대 치려면 지금이 기회야.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남자는 이상하게 들어 올린 주먹을 그대로 소년의 머리통을 향해 내려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아무 응징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내려놓는다면 분명히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남자는 손바닥으로 소년의 얼굴을 덮으며 시답잖은 장난을 쳤다. 그에 소년이 제 손을 잡아채며 허우적거렸다. 남자는 그제야 속이 조금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른을 넘긴 어른이 갓 스물을 넘긴 어린애를 데리고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유쾌함이 올라오는 것은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남자는 영원히 애라고.


“으, 손은 씻고 다니십니까?”

“인마, 너무 깔끔 떨어도 여자한테 인기가 없어요.”

“형씨가 언제는 뭐 인기가 있었던가요? 다른 차원의 문제 아닙니까? 히지카타씨 정도는 생겨야 인기고 뭐고 논할 거리라도 있지.”


남자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잊지 못했다. 쟤가 지금 꼴에 제 식구라고 편드는 거지? 그렇지? 아니꼽기도 아니꼬웠고, 그렇게나 싫어하는 주제에 아무렇지 않게 잘생겼다 말하는 모양새가 기가 차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년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인지 남자의 얼굴을 빤히 보다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암만, 뱉어 놓고 보니 저도 꼴사나웠던 게지. 남자는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부러 참지 않고 들으란 듯 내뱉었다.


“아이고, 잘생긴 상관 밑에서 일하시는 누구는 참 좋으시겠어요. 응?”

“......실언입니다.”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히지카타군이 잘 생긴 거야 요시와라의 날고 긴다는 유녀들이 다 인정하는 사실인걸.”

“아, 제가 잘못했어요. 그만하세요.”

“죄 많은 남자야, 히지카타군은. 같은 사내가 봐도 얼굴 하난 봐줄만 하다니까.”


소년은 똥 씹은 얼굴로 다시 수면안대를 내렸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남자는 소년의 기분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너네도 참 웃기는 놈들이란 말이야. 그렇게 애틋해서 어떻게 떨어져는 다닐 수 있냐?”

‘차라리 안 보는 게 편하거든요.’


소년은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며 남자의 말을 무시하는 척 했다. 남자는 소년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안대로 시야를 가렸지만 옆에 붙어오는 남자의 기척에 소년은 조금 불쾌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에티켓 거리라는 개념을 밥 말아 먹은 것이 분명했다.


애석하게도 옆에 붙어 앉은 남자는 소년의 불쾌감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더 진득하게 몸을 밀착해왔다. 그는 소년이 미미하게 엉덩이를 옆으로 옮기면 득달같이 달라붙어왔다. 결국 소년은 안대를 내리고 불쾌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좀 떨어지시죠?”

“왜 그래? 우리 사이에.”

“이렇게까지 가깝게 얼굴을 마주할 사이는 아니죠.”

“나랑 잘래?”


남자가 음흉한 목소리로 소년의 귓가에 속삭였다. 소년은 한 방 먹은 얼굴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지척에서 마주한 남자의 발간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갑다 느꼈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의 눈이 개구지게 휘어졌다.


“이 말을 언제 되돌려주나 했지. 요 싸가지 없는 녀석아.”


그는 벤치에서 엉덩이를 떼며 일어났다. 소년은 얼빠진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제법 속이 시원한 모양이었다.


“유치하긴......”

“잘 생각해보라고. 반쯤은 진심이니까.”


소년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 약이 올랐다. 남자는 소년을 등진 채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런 남자의 등에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며 낮게 욕을 지껄였다. 그러나 속이 시원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명백히 자신이 한 방 먹은 것이 분명했기에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분량조절 실패....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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